‘사르다’ - ‘살다’ - ‘삶’ - ‘사람’ : 땅 위, 하늘 아래에 변화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름(삶)을 명 받은 생명체
우리말 ‘사람’이라는 말은 ‘삶’에서부터 나왔다. ‘삶’은 ‘살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살다’는 ‘사르다’에서부터 나왔다. ‘사르다’, ‘살다’, ‘삶’, ‘사람’으로 이어진다. ‘사르다’는 일종의 기운을 사르다, 그리하여 열을 내다, 에너지를 사르다, 열을 돌려서 힘을 만든다 등을 뜻한다. 열돌이와 힘돌이가 사르는 것이다. 인간만이 사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사르는 삶을 이어간다. ‘살다’라는 낱말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상상력과 기억을 파헤쳐 본다면 그 밑바탕에는 연소작용, 즉 불을 사르는 현상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살다’라는 말은 원초적으로 보아 불이 타고 에너지가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옮아간다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⑴ 에너지는 태양에서 비롯되기에 태양은 예로부터 불의 상징이었고 삶의 바탕인 대지를 생성시키는 ‘화생토(火生土)’의 본거지이며 모든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에너지 공급원이다.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가는 것이 넓은 의미의 ‘사르다’, ‘살다’를 뜻한다면 땅 위, 하늘 아래에 변화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름(삶)을 명 받은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명을 사르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이 바람을 다석은 얼김 또는 숨김[숨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보통 호흡을 통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호흡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잘 살펴보면 숨김이 우리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숨날숨’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숨김이 낱생명 안으로 들고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체는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숨쉬면서[호흡(呼吸)하면서] 산화(酸化)작용을 하며 생명의 불꽃을 일으킨다. 이러한 얼김과 숨김이 일으키는 사름 속에서 숨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말[말숨]도 통하고 생각[뜻숨]도 통하고 신[얼숨]도 통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코에 숨이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생각이 통하고, 영혼이 신에 통하는 삶을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통해야 살고 막히면 죽는다.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 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목숨을 키우고 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게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이 우주의 기운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옴도 다 우리의 목숨을 키우기 위해서 있다. 우주와 세계와 인생이 모두 목숨 키우기 위해 있다.”⑵
그러나 다석은 목숨을 가지고 사는 것을 탐하면 그것은 얼빠진 사람이며 거짓삶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삶을 가지고 천명을 완성한 사람은 참 사람이요 진실이다. 마음을 가지고 몸에 집착하면 망령이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살리는 것이 진실이다. 천명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육체의 삶이다.⑶
사람이 몸으로 숨 쉰다는 것은 산화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때 맘으로는 자아(自我)의 심주(心柱)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얼의 불을 붙여 생명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나[자아(自我)]를 얼로 불태워 참나인 영생의 나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⑷ 몸나를 살러 참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다석은 생명의 성화로(聖火爐)에 생명의 불을 태우느냐 못 태우느냐를 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생각을 불사르는 것이고 그것으로 정신이 높아진다. 그럴 때 자꾸 말이 터지게 된다. 다석은 자신이 말을 자꾸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말에 태우는 것을 사른다고 한다. 생각의 불꽃을 태우는 것은 말씀 사뢰는 것이다. 우리 속에 생각의 불꽃을 사르는 것이 있으니 말씀을 사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를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꽃이 있게 마련이다.⑸
낱생명의 사는 살림이란 물질을 번제(燔祭)드려(불살라서) 그 피어오르는 불꽃으로(만물의 끝은 꽃이요, 꽃은 불꽃이다) 우주의 생명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섭취한 식물도 필경은 피로 피고야말 꽃이요, 불꽃이다. 한 사람이 가진 적혈구가 24조 개로 피어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꽃바다며 불꽃바다로서 동산보다도 더 큰 바다로 여겨지지 않겠는가?⑹ 다석은 만물의 끝으로 된 이 피(에너지)가 불꽃 곧 번제라고 말한다. 그 불꽃을 반드시 위로 올라가는 꽃내(향기)로 씌워서 살라야, 사람이 사름, 말씀을 사름, 불을 사름이, 동일사(同一事), 동일사(同一詞)로 된다고 말한다.
거룩한 생각(사상)으로 살라 올려야만 한다. 머리를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며 하는 생각은 사람을 죽게 하는 생각이 되지만, 머리를 위로 우러러 들게 하는 거룩한 생각은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불꽃이다. 이런 생각을 못함으로 사람의 머리가 아픈 것이고,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그의 머리는 성향로(聖香爐)의 상구(上口)로 거룩한 불꽃을 온전히 위로 정(精)하게 올리는 임무를 하니, 그의 머리는 더욱 시원할 것이며, 전성단(全聖壇)(전신)의 제물(祭物)(에너지)도 치열하게 탈 것이다.⑺
숨 쉼, 곧 ‘하느님의 숨어 쉼’
다석에 의하면 숨은 피를 돌리고, 피는 양분을 옮기고, 양분은 일할 힘을 내며, 힘은 양분을 얻는 것과 목숨을 돌아보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함이니 숨을 위한 일이요, 일을 위한 숨이다.⑻ 다석은 사람이 코로 숨쉬는 호흡에서 한얼 또는 하느님의 숨쉼을 본다. 다시 말해 숨쉼을 곧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풀이한다.
사람은 일생동안 9억 번 호흡한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사는 것이며 숨을 내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들이마시고 한번 내쉬는 것은 한번 낳다가 한번 죽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한번 숨쉬는 데에서 생(生)의 덧없음과 명(命)의 보통 아님을 볼 수 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한번 내쉬는 것이 곧 생명의 내용이다. 나무의 경우 나뭇잎은 돋아났다 지지만 나무는 그대로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변하는 것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사람의 경우에도 몸과 맘의 나로는 변하면서 얼의 나로는 변하지 않는데 바로 그것이 영생하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생명의 비결은 한결[常]을 알아 그 가운데 드는 것이다.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다. 얼의 생명이 되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⑼
그렇게 볼 때 목숨은 기쁨이다. 사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다.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생각은 진실한 것이다. 삶이 덧 없어도 목숨같이 만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허무한 것 같아도 목에 숨쉬듯이 한 발자국씩 올라가면 하늘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
“육체로 사는 생(生)은 무상하지만 정신으로 사는 명(命)은 비상한 것이다. 비상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다. 독특하다는 것이다. 사명을 깨닫고 사는 삶은 독특한 것이다. 무상생(無常生) 비상명(非常命)이다.”⑽
숨은 코로만 쉬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도 숨을 쉰다. 정신의 숨이 생각이다.⑾ 다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란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말한다. 마치 나무에게서 태양이 숨어 쉬는 것이나 같다. 가을이 되고 봄이 되는 것은 태양의 숨쉼이다. 태양의 숨쉼에 따라 나무가 자라나고 나무가 시든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태양의 숨쉼이다. 그런데 사람의 숨쉼은 동물의 숨쉼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숨쉼이 겹쳐 있다. 다석의 제자 김흥호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느님의 숨쉼은 말숨 쉼이요 문화 문명의 창조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사람은 문화를 창조한다. 이것이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징표다. 문화의 창조, 이것은 쉴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사명을 잊고서 문화 창조를 안 하고 동물처럼 새끼나 치려고 한다. 이것이 죄악이다. 하느님은 쉬지 않고 우주를 창조하고 계시다. 이것이 하늘 소식이다. 우주는 나타났다가는 숨고, 계속 창조와 진화는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숨쉼이요 우주와 세계와 인생의 창조이다.”⑿
다석은 성령의 바람을 범신(汎神)으로 보고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⒀ 우리는 성령의 바람으로 정신적인 숨쉼을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 맘의 얼이며 참나다.⒁ 다석은 성령과 통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에서 하느님의 마루[뜻]를 읽어내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말로 세워[말슴] 말로 쓰면서[말씀] 하느님의 소식을 전해주며 말숨을 쉬는 말씀[말숨]살이를 산다고 말한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의 살림살이는 단순히 먹고 자식을 낳는 몸살이로서 끝나서는 안 된다. 몸집 속에 몸을 사르며 위로 올라가는 생명의 향기를 피우는 참생명의 꿈틀거림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깊은 생각 속에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마루[뜻]를 귀기울여 듣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잡아서 세우고 그 말을 써서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말씀[말숨]의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 생명은 목숨인데 목숨은 말씀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끊이지 않고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뽑았으면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억지 마음은 버려야 한다.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실을 뽑아라. 집을 지어라.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라.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예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지어놓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려 왔다. 실 뽑으러 왔다. 생각하러 왔다. 기도하러 왔다. 일하러 왔다.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⒂
다석에 의하면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은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은 얼이다. 얼은 제나[몸나와 맘나]가 죽어서 하는 생명이다. 다시 말해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요 회심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16) 그런 삶이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을 태우며 전체인 빈탕한데에로 돌아가는 참생명이다.
▶ 다음 편에서는 ‘얼나의 하루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참조 정호완, 『우리말의 상상력. 우리말 어휘의 기원을 통해 본 겨레의 정서와 의식구조』, 정신세계사, 1991, 227.
⑵ 류영모, 『다석어록』, 197.
⑶ 참조 류영모, 『다석 류영모 명상록 1』, 류영모 일기, 김흥호 풀이, 성천문화재단, 1998, 44.
⑷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40.
⑸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40/1. 『제소리』, 213.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290/1.
⑹ 참조 류영모, 『제소리』, 328.
⑺ 참조 앞의 글 같은 곳.
⑻ 참조 류영모, 『제소리』, 388.
⑼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202.
⑽ 류영모, 『다석어록』, 174.
⑾ 참조 류영모, 『제소리』, 259/60.
⑿ 김흥호,『다석일지 공부. 류영모 명상록 풀이 2』, 솔, 2001, 227/8. 참조 류영모, 『다석일지 1』, 홍익재, 1990, 304.
⒀ 참조 류영모, 『다석어록』, 215.
⒁ 참조 같은 책, 233.
⒂ 류영모, 『다석어록』, 177/8.
(16)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91/2.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