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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을 경험한 사람은 ‘있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다
  • 이기상
  • 등록 2020-03-16 10: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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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계신 하느님, 없이 살아야 하는 인간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개념 틀은 ‘있음[존재]’인데, 우리에게는 그 있음보다 훨씬 더 위에 ‘없음[無․空․虛]’이라는 더 큰 개념의 틀이 있다. 그러기에 그들과 우리의 이해의 지평은 다르다. 없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성으로는 할 수 없는) 없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분명 그런 이야기들은 말이나 개념으로 명확하게 잡을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 차원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이해된다. 무의 경험, 없음의 경험, 빔의 경험을 한 사람은 있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있다.


▲ (사진출처=다석사상연구회)


다석은 우리의 있음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잡을 길 없는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이름할 수는 없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한늘(절대 공간인 ‘한’ + 무한 시간인 ‘늘’), 하늘, 한아(한 ․), 하나, 한얼,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한 나[大我], 한웋님이라 불렀다. 다석에게는 이러한 온전한 것, 깨지지 않은 것,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어떤 것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적인 것이다. 무한한 시간을 다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저 침묵의 끝을 알길 없는 어두운 우주 공간이, 무한히 뻗어 가는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의 푸른 창공이,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사건까지도 다 자신의 영원한 고요와 적막 속에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성스러운 것이며 전형적으로 신적인 것이다. 그러한 깨끗한[= 모든 끝을 끝까지 깨부수는] 거룩한 신적인 ‘있음’은 유한한 있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러한 하느님의 있음을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한다. 


“허공은 맨 처음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근원이다.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하느님이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 보니 빈탕이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단 하나의 존재인 온통 하나가 허공이다. 환상의 물질을 색계라 한다. 유일 존재의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허공은 하느님의 맘으로 느껴진다.”


다석은 무에서 유가 유래하고, 무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아주 빈 것[絶代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것이 참이다. 이것이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질과 질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 분자와 분자 사이, 원자와 원자 사이, 전자와 전자 사이, 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없음이 일으키는 바람에 얻어맞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러한 없이 있음을 느끼며 깨닫는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지성으로도 잡을 수 없고 이성으로도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그 없음을 알아 볼 수 있는 얼의 눈이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은 이 독특한 없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석은 그러한 없이 있는 텅빔, 빈탕한데가 절대생명이며 하느님이며 성스러운 존재, 거룩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없이 살았다. 


이제 끝으로 다석의 생명사상에서 우리가 배워 실천할 수 있는 영성적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도록 한다.


‘얼나’로서 참생명을 사는 삶의 모습



다석을 공부하면서 글쓴이가 나름대로 끄집어낸 영성적 가치관은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의 가치관이다. 다른 말로 ‘살림살이’의 영성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살림은 생명사랑, 섬김은 하느님사랑, 비움은 자연사랑, 나눔은 이웃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의 가치를 우리 삶 속의 가치로 승화시켜 생활할 때 우리의 지구는 희망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이좋게 사이를 나누며 사는 ‘지구살림살이’이다. 빔-사이, 사람[몬]-사이, 때-사이 그리고 하늘-땅-사이를 사이좋게 나누며 사는 생활이다. 사람은 이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 존재다. 


사람은 살림을 알고 살림을 살아야 하는 살림지기다. 우리말 ‘생명’에는 살아야 한다는, 살려야 한다는 하늘의 명령이 간직되어 있다. 우리에게 생명체는 태양의 힘을 받아 땅을 뚫고 솟아나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해당된다. 생명이라는 낱말 자체가 하늘의 명을 받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 있는 한얼과 일치하여 모든 것 속에서 한얼(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 ‘얼나’로서의 인간의 사명이다. 다석의 말대로 얼나로서 참생명을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식사는 장사며 제사”라는 다석의 말이다. 


이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우리는 먹는 행위에서부터 생명사상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들은 생명체들이며 이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꼭 필요한 양만을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생명사랑과 더불어 자연[생태]사랑을 함께 실천할 수 있다. 우리가 일 년에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우리나라에서만 십수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것을 줄여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생태(환경)사랑과 더불어 이웃사랑[나눔]도 실천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마더 데레사의 “나눔 없이 평화 없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원인은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76억 인구가 모두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먹고 남아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남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위 선진국의 경제논리다. 그런데 나눔이 없는 한 세계평화를 기대 할 수 없다. “식사는 장사다”의 정신으로 한 끼니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다석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먹는 것을 조금만 줄여 그 줄인 부분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눠줄 수는 있을 것이다. 


셋째, 다석의 가온찍기 하루살이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소유 중심에서 나눔과 비움 중심으로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나눔을 통한 비움, 비움을 통한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이 제 긋’으로서 이어 이어 나에게까지 이어져온 내 생명의 ‘긋’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얼의 뜻을 깨달아 한얼과 더불어 우주 또는 지구 살림살이에 동참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없이 살며 이 몸을 나누고 비우다 종국에는 텅빔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몸나를 끝내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나는 매일매일 자신을 비우고 ‘할 우(하루)’를 실천해야 한다. ‘한웋’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해야 한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한 방법으로 장기기증, 시신기증을 할 수 있다. 


넷째, 다석의 사상을 이어받아 함석헌처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생각에는 ‘드(되)는 생각’, ‘하는 생각’, ‘나는 생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드(되)는 생각은 하지만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창의적으로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 훈련을 많이 하여야 한다. 하이데거는 생각에는 ‘셈 생각’과 ‘뜻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셈 생각은 많이 하지만 뜻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일름, 한얼의 숨결, 존재의 뜻을 읽어내어 거기에 응답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 뜻을 찾아나갈 때 그 뜻에 대한 대답이 ‘나는’ 생각이다. 


생각하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침묵, 명상, 생각 속에 한얼과 일치하는 삶을 생활화해야 한다. 진리 찾기와 참나 찾기를 함께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석은 하느님의 없이 계심 같이 그렇게 없이 살 것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가르치는 것은 모두 다 제일 마루[종(宗) = 하느님]로 가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턱 깨닫고 나가는 시간이 있어야 해요. 학(學)은 각(覺)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교(敎)는 각(覺)으로 성불(成佛)하면 깨끗해집니다. 깨끗은 깨끝입니다. 상대계가 아주 끝이 나도록 깨트리면 진리인 절대가 나타납니다. 참 나를 깨닫는 것이지요. 깨끝이면 아멘입니다. 다 치워야지요. 없도록 치워야 해요, 아직도 덜 치워 남아 있으면 덜 없지요. 덜 없으면 더럽지요. 덜 치워 덜 없는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 다음 편에서는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다석의 인간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편 보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박영호 풀이, 152. 류영모, 『다석강의』, 465.

⑵ 류영모, 『다석어록』, 161. 류영모, 『다석강의』, 452/3.

⑶ 글쓴이는 그 동안 살림살이의 가치관에 대해서 몇 개의 글을 발표하였다. 참조 이기상, <세계화와 동아시아 가치. 나눔과 섬김 속의 살림살이>. 『2003 만해축전』,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편, 35~89; <생명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지구 살림살이를 위한 생명학>,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생명문화』(세계생명문화포럼_경기2003 자료집), 105~123; <김지하의 생명사건론. 생활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우주적 대해탈>, 『해석학연구 제12집. 낭만주의 해석학』, 철학과현실사, 2004, 495~574.<삼신 할매의 살림살이 이성이 현대 사회의 삶에 가지는 의미>, 『동아시아 문예부흥과 생명평화』(세계생명문화포럼_경기 2005 자료집), 345〜363.

⑷ 박영호 편,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성천문화재단, 1994, 172. 다석은 1963년 1월 11일의 일지에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기록하였다. 
<ㅁ·ㅁ 밝 빟 텅> 
덜 없다 다 없어야 한다. 아주 없어야 한다. 
몬이 지고 티가 끌는 깨끗조차 없어야 한다. 
거룩히 몬․티 나부랑 치이 비히 다 돼 없. 
류영모, 『다석일지 2』, 1990, 86. 참조 박영호의 풀이. 류영모, 『얼의 노래』, 박영호 풀이, 두레, 2004, 168 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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