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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지고 싶으냐?” - [이신부의 세·빛] 벳자타에서 일어난 일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3-24 12:55:40
  • 수정 2020-03-24 12: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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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화요일 (2020.03.24.) : 에제 47,1-9.12; 요한 5,1-16



오늘 독서는 천사가 보여준 환시를 에제키엘 예언자가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보고 전해주는 생명의 강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내다보았듯이, 에제키엘도 장차 메시아와 메시아적 백성이 이룩할 일의 영적인 효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력을 돋구어주는 일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앞에 있던 벳자타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38년 동안이나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채 앉은뱅이로 구걸하며 살아야 했던 병자를 만나신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튼튼한 몸으로 고쳐주신 기적이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이 벳자타의 기적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언젠가 못 안에 있는 물이 스스로 출렁일 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미신만을 믿고 의지해 왔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나긴 세월 동안 절망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사두가이들이나 바리사이들 같은 유다교의 엘리트들은 이런 무지렁이 장애인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고 도리어 죄를 지은 탓으로 받은 벌이라고 낙인찍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랫동안 그런 터무니없는 미신 속에서 누워 지냈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보셨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이런 상황에서의 물음은 그가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왔고 다른 이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의존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의 운명과 삶은 여전히 그 자신의 것이라는 가치에 입각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신 이유는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미래를 개선하고자 하는 원의를 그가 그 자신의 생각과 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까닭에서였습니다. 노예나 짐승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 대우를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이런 노예 아닌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병자와 장애자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곳마다 이런 무지렁이 백성을 숱하게 만나셨고, 그때마다 열과 성을 다해서,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원하는 대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되찾은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백 마리 중의 한 마리라고 보일지언정 그 잃어버린 양은 그 어떤 양도 겪을 수 있는 삶의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즉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눈앞에서는 비록 한 사람, 한 마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러한 위기에 처한 존재들은 대다수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나 ‘보조성의 원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처신을 설명해 주는 사회교리 용어입니다.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비록 엘리트나 권력자들에 비하여 전체 공동선에 대한 책임에 있어서 보조적인 몫만 부여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공동선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숫자로 따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절대적이고 천부적인 가치라서 그러하고 둘째, 사실은 그러한 처지에 놓인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전체 사회 구성원 안에서는 결코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대다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에제키엘이 예언했듯이 이런 무지렁이 존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일인데, 그렇게 되면 그는 그동안 받지 못하던 혜택도 누리게 될 뿐 아니라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힘으로 사회 공동선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혜택을 부여할 수 있도록 참여하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보조성의 원리는 자주성의 원리 또는 자율성의 원리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원리는 그동안 소외되고 배제되어 왔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뜻일 뿐이지 가난하지 않은 중산층이나 부유층을 배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그 가난에서 벗어나 중산층 대열로 들어서야 그들도 공동선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지만 또한 전체 사회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몫이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모든 이를 고르게 대하라는 공평함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교회를 향해서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촉구했던 메시지의 뜻도 같은 것입니다. 부유하거나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을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부유층과 중산층에 속해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그 가난이라는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줌으로써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고, 공동선의 혜택을 똑같이 받을 수 있도록 해 줄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몫을 차지하도록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식이든 사회적 영향력이든 재물이든 가진 것을 쌓아놓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서 교회 자신은 가난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벳자타에서 일어난 일에 담겨 있는 에제키엘의 메시지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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