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월요일 (2020.04.20) : 사도 4,23-31; 요한 3,1-8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쁨을 노래해 온 팔일 축제를 마치고 본 부활시기로 들어갑니다.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믿는 이들과 나누고 또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이에 따라 사고방식까지 바뀌어도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진리는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을 위한 진리 형식도 필요합니다.
진리는 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가 물인데 이 물이 고체 상태에서는 얼음으로 있다가 기체 상태에서는 수증기로 변하지만 물의 속성은 그대로입니다. 또 물도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물에 함유된 성분에 따라서도 구분되는데 칼슘과 마그네슘이 많으면 경수 또는 센물이라고 부르고, 적으면 연수 또는 단물이라고도 부릅니다. 미네랄 성분이 많으면 광천수, 게르마늄 성분이 많으면 육각수, 알칼리 성분이 많으면 이온수, 질소나 규소 성분이 많으면 해양심층수, 탄산 성분을 가미하면 탄산수, 수증기를 냉각시키면 증류수가 됩니다. 그래서 용도와 목적에 따라서 마셔야 할 물도 다릅니다. 진리인 하느님의 복음이 표현되는 언어 형식도 물처럼이나 다양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강생의 복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언어는 하느님 나라와 메시아였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민족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저 우상만 숭배하고 있었을 무렵이었고, 그나마 하느님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던 유다 민족이 알고 있던 언어가 하느님 나라와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하느님 나라라고 기록하면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 나라의 현실에서 우리 각 개인은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복음사가들이 기록한 복음서의 연대기를 새롭게 재편성하여 개선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생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찰 범위를 한껏 넓혀서 한처음부터로 시작하여 영원까지로 바꾸었고, 넓혀진 관찰 범위에 걸맞게 관찰의 차원 역시 깊게 함으로써 사회적 차원에서 맞이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영적 차원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현실로 나타남을 깨우쳐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라는 제1표현이 의미하는 본질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초래하는 파스카 과업을 꾸준히 상기시키면서 이를 위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와 동시대의 유다인들을 위해서 사도들은 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몸소 실현해 살아가셨음을 예수 부활의 복음으로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메시아께서 박해를 받아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만큼은 직접 그리고 여러 차례 발현하시어 그 사도들이 이런 확신으로 만방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만방에 복음을 선포하기에 앞서 그리스-로마 문명권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이들도 예수 부활의 복음을 깨우칠 수 있도록 성령 강림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과 이 소식을 진리로서 만방에 선포해야 함을 일깨워주신 분이 성령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성령 강림의 복음으로 바뀝니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표현하는 언어 형식만 바뀌는 것입니다.
유다 민족을 넘어 그리스와 로마가 이룩한 문명권에서 살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면서는 그리스적 사유도 반영하느라고 근 사오 백년 동안 각종 이단에 시달린 끝에 삼위일체의 교리로 이 진리를 가르쳐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이 예수 부활의 복음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깨우쳐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셨고, 이 성령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깨우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실 영적인 인도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사도신경에 명문화된 진리의 형식이라면, 그 이후에는 성체성사의 진리로 교회가 복음을 선포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성체성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빵처럼 먹거나 생명의 물처럼 마실 수 있었으며,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급격히 사회화되면서 역대 교황들은 성체성사의 실천적 측면에 주목하게 되었고 근 백여 년에 걸쳐서 사회교리를 반포하였습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의 복음이요 부활 신앙의 언어이며 사회적 복음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여 계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나서 다양성 안의 일치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으며, 특히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성체성사로 보통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이끄심과 교회의 배려는 사회교리를 실천함으로써 성체성사가 지향하던 거룩한 변화를 일상의 사회생활에서 이룩할 수 있도록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