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간 토요일 (2020.6.6.) : 2티모 4,1-8; 마르 12,38-44
성령강림 대축일 이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이미 받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는 데 쓰일 수 있는지를 그날의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은사로서 복음을 들려주시고 주관하시며 완성하실 하느님께 대하여 경외하면서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두려워해야 할 바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경외심 혹은 두려워함으로 불리어지는 이 은사는 복음선포의 주관자이시고 완성자이신가 하면 심판자이기도 한 하느님의 역할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일러줍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로 봉독된 말씀에 의하면, 이 복음선포의 자세와 마음은 ‘가난한 과부’와 ‘의로운 화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상징되는 현세적 가치에 대한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 ‘가난한 과부’ 이야기에 담겨 있으며, 이와 함께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느라고 벌인 노력과 거둔 성과를 평가함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마음이 ‘의로운 화관’ 이야기에 담겨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합하여 복음선포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는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가진 돈이 많았던 부자들은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지닌 힘을 이용하여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에서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부재지주로서 막대한 임대수입을 취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가난해진 이들이 돈을 빌리러 오면 고리대금업으로 쌓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부와 재산은 착취로 얻은 불의한 재산이었습니다. 이를 위장하느라고 그들은 헌금을 많이 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 재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뚤어진 현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놓고 비난하는 일은 피하셨지만 그렇다고 칭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가진 것이 궁핍하여 얼마 되지도 않는 생활비를 쪼개어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유한 바리사이들에 대해 에둘러 비판하시는 모양새입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진 재산이 많음을 자랑하는 그 자체가 하늘에 쌓기를 멀리하고 있다는 자기폭로입니다.
재물은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눔이요, 공동선을 위한 투자입니다. 사회와 정부가 미처 하지 못하고 있는 공동선의 구석을 교회가 신자들로부터 받은 헌금으로 보살피면 그것이 나눔이요 하늘에 쌓는 것이 됩니다. 신앙인들이 자기가 일해서 번 돈으로 개별적으로나 혹은 공동체 단위로 나눔과 투자를 해도 똑같은 복음선포입니다.
이 나눔과 투자에는 긴급구호처럼 일회용으로 돕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복지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나 시설을 세워 도울 수도 있고, 당사자들이 주체가 된 공동체 운동을 뒤에서 돕는 일도 있으며, 아예 빈곤이라는 사회병리현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입법활동이나 정책개선활동 또는 사회계몽운동을 벌이거나 이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나 정부가 공동선에 대해 벌이는 노력을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복음선포의 자세가, 가난한 과부의 일화를 보도한 복음사가의 편집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이는 적어도 교회가 신자들이 하느님께 바친 헌금을 맡아서 쌓아두어서는 안 되며, 최고선의 뜻에 따라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한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같은 이치로, 신자들이 자신이 일해서 번 돈과 그렇게 모은 재산을 남겨서 땅에 쌓아두지 말고 죽기 전에 최고선의 뜻에 따라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지요.
사도 바오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했습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어느 사도보다도 복음적으로 살았습니다. 가난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천막 만드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생활비와 활동비를 스스로 벌어서 마련했으며, 기성 사도들이 관할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코린토 공동체를 통해서 모금을 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천막 노동으로 마련한 돈으로 값비싼 양피지를 사서 각 공동체에 편지를 써서 보냄으로써 말씀 전례에서 돌려가며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을 남기지 않았고 제자 몇 사람과 공동체들을 남겼습니다. 그런 그가 남기는 유언이기 때문에 무게가 있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뜻과 사람을 남겨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티모테오와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당부라면, 다음은 자기 자신의 고백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아끼거나 쌓아두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투자하여, 마침내 의로운 화관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