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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신들의 흔적을 알아챔 - [이기상-신의 숨결]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성스러움 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06-08 10:48:02
  • 수정 2020-06-07 2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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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싯말과 성스러움


존재는 언제나 항상 스스로를 비추면서 언어에로의 도상에 있으며 사유는 존재의 진리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이렇게 스스로를 비추며 언어에로 오고 있는 존재에 의해 요청 받도록 내맡겨야 하며, 그렇게 하여 “사유에서 존재가 언어에로 오게”끔 해야 한다(Hum 145).


사유자는 그렇게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언어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비추면서 숨기며 오는 존재 자신의 도래”이다(Hum 158). 그런데 하이데거는 시작(詩作)이 비로소 언어를 가능케 만든다고 말한다.(EH 43) 달리 말해 언어는 “존재가 낱말이 되는 것”으로서의 시작인데, 그 까닭은 시작이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존재를 건립하는 명명”이기 때문이다(EH 43). 이때의 시작은 물론 제멋대로의 말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말하거나 명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스러움이 우선 먼저 시인에게 그에 필요한 낱말을 선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본질적 신분은 신을 수용하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성스러움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EH 69). 


시인은 성스러움을 명명한다. 이렇듯 하이데거는 시작이 그 본질에 있어 “존재자의 진리의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함”이며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말함으로서” 본질적 의미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의미로 하이데거는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구절을 말한 것이다. “시인의 명명과 사유자의 말함은 같은 유래를 갖고 있다.”


낱말에 의한 존재의 건립


“머무는 것은 그런데, 시인이 건립한다.”(EH 40) 하이데거의 해설을 좇아 횔덜린의 “회상” [추념]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음미해 보면, “본질적인 낱말”로써 존재자를 처음으로 그것의 존재에 있어 “열어젖히는” 자들이 시인들이다.(EH 41) 이러한 “명명을 통해서 존재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바 그것이라 불리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시작은 “존재를 낱말로써 건립함”(EH 41) 또는 “모든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립하는 명명”이며(EH 43), 이 명명은 존재자를 그 존재나 진리에로, 사물들을 그들의 본질에로 보내어 그렇게 세계와 역사를 존재하도록 만든다. 


▲ Nicholas Roerich < Bhagavan >


그런데 세계는 신들이 죽을 자들을 자신들의 요청 아래에 세우고 시인이 이러한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써 신들을 명명할 때에만 비로소 열린다.(EH 40) 그럴 때 시작은 “신들을 근원적으로 명명”하는 것이 된다.(EH 42, 45) “신들의 눈짓에” 시인은 결속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눈짓과 말함의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안에서 한 민족은 항상 이미 존재자 전체에 대한 자신의 귀속성을 기억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중간에로” [사이에로] 내던져져 있으며 거기서 그는 이 눈짓을 붙잡아 그것을 그의 민족에게 이어서 전달해야 [눈짓해야] 한다.(EH 46/7)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시인의 말함이 “눈짓”으로 시인에게 말건네 오는 “신들 자신에” 의해서 언어에로 이끌려 오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 눈짓을 붙잡아 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말함은 “민족의 소리”에 결속되어 있다.


수줍음(Scheu, 겁먹음)은 근원[성스러움]을 직접 경험할 수 없음을 앎이다.(EH 131) 근원 가까이에 ‘거주함’이 — 근원에 의해 가능하게 되어 — 이제는 시인이 건립해야 하는 머무는 것이다. 그런데 근원은 (신들과 인간들을 위해) 그 사이의 열린 장이 비로소 이제 열리게 되는 그런 축제 속에서 발원해 나온다. “이렇게 앞서 열고 있는 것이 성스러움이며 앞서 이미 모든 시작이 노래한 예측할 수 없는 시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모든 건립함이 자신이 건립한 것을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EH 148) 건립되는 것은 머무는 것이다. 시작은 근원에 확고하게 붙여놓음이다. 


근원의 근거에 대한 회상


시작은 성스러움이 “낱말을 선사하고” 그래서 그로써 “스스로가 낱말 속으로 올” 때에만 가능하다.(EH 70이하, 76) 오직 그 경우에만 낱말이 성스러움의 “사건”이 된다.(EH 76) 이러한 사건은 성스러움이 자신의 도래에 있어 인간을 부르고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주 인사하며 부를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도래하는 것 자체에 의해 부름을 받아 이것을 오직 이것만을 성스러움으로 말하는 그러한 시원적인 부름에로” 능력을 부여할 때 일어난다.(EH 76) 


이렇듯 성스러움은 “모든 시작을 넘어 시작을 하고 있다.”(EH 148) 시인은 성스러움을 그저 단지 “인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 자신이 인사를 받을 때에만” 그렇다.(EH 99) 그는 성스러움의 “사절”인 천사들을 만나 인사하는 자로서(EH 16) “사용되고”(EH 116) 있으며 “가리키는 자”가 되기를 “독촉 받고” 있다. 그리로 시인이 “보내어지고” 있는 이 “가리킴”은 그가 “있어온 것을 도래하는 성스러움으로” 사유할 때, 이러한 의미로 “회상”할 때, “걸맞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EH 99, 106) 이렇게 회상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말함을 통해 신들이 “스스로를 느끼고 그래서 스스로를 이 지구상의 인간의 주거지에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시인은 가리키는 자로서 인간과 신들의 중간[사이]에 서 있다. 그는 이 중간[사이]에서부터 이 둘 위에서 각기 상이하게 이 둘을 온전하게 하며 시인에게 자신을 말해야 할 시로서 주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사유한다. 그는 죽을 자로서 사유하며 최고의 것을 시로 짓는다.”


시작이 회상으로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거처함이, 즉 성스러움의 영역에서 시적인 것이 항상 새롭게 확정되고 확고하게 만들어지고 이러한 의미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이 항상 거듭 “샘물”(EH 130)에로, “원천의 가까이에로”(EH 144), “근거”에로의 걸음을 내디딜 때에만, 자신을 “가리키면서 머물러 있는 것”에게 열고 있으며 그에게 자신의 “낱말”로서 인사하는 온전함과 성스러움에로 갈 때에만 일어난다.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


원천의 근거를 회상하는 것인 시작은 단순히 지나간 것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회상은 인사하면서 부름을 받은 것을 현재로 불러온다. 부름을 받은 것의 도래는 우리에게, 부르는 인간에게 하나의 미래를 열어주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는 원천을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미래로서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에게 낱말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 — 그래서 인간이 그 낱말을 갖고 그 자신의 현재에 도래하고 있는 원천을 인사할 수 있도록 — 은 다른 것이 아닌 성스러움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사유가 존재의 도래에, 그리고 시작이 신들의 눈짓에 결속되어 있음을 보았다. 이제는 원천의 근거를 회상함인 시작이 성스러움이 낱말로 옴에, 즉 성스러움의 도래에 결속되어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시작은, 하이데거가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를 따르면, “존재자 그 자체의 진리의 도래가 이루어지도록 함”이며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에로 정립함이며(16) 진리의 건립(17)이다. 시작은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본래적인 의미의 언어이다.(18) 그렇다면 시인이 거기에 결속되어 있다는 성스러움의 낱말의 선사가 사유자가 거기에 결속되어 있다는 도래로서의 존재와 똑같다는 말인가?


심연에 이른다는 것은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을 알아챔이다. “신들이 그 안에서 오로지 신들인 바로 그 에테르가 신들의 신성이다. 이러한 에테르의 요소가, 그 안에서 신성 자체도 아직 현성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다.”(Hw 250) 이제 성스러움은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이다.


오늘날은 이러한 흔적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아니 이러한 상실된 흔적을 위한 흔적마저도 거의 지워져 버린 상태다(Hw 251). 적어도 우리가 성스러움을 여전히 신적인 것의 신성을 위한 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지, 또는 우리는 그저 성스러움을 위한 흔적만을 만날 수 있는지가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어떤 것이 흔적을 위한 흔적이 될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 어떻게 그러한 흔적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는지 하는 것도 의문인 채 남아 있다.”(Hw 253)


▶ 다음 편에서는 ‘성스러움의 차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참조 Hum 192.

⑵ 참조 Hum 145.

⑶ M. 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형이상학 입문), Tübingen 1976, 141.

⑷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kes (예술작품의 근원)”, Hw 59.

⑸ Hw 61.

⑹ “Nachwort...”, Wm 107. “하이데거에 있어서 사유와 시작의 공통의 유래는 그 안에서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스스로를 내보이는, 언어를 통해 일어나는 존재의 밝혀져 있음이다.” W. Anz, “Die Stellung der Sprache bei Heidegger (하이데거에서의 언어의 위치)”, Heidegger. Perspektiven zur Deutung seines Werks, hrsg. von O. Pöggeler, Köln/Berlin 1969, 315.

⑺ 참조 EH 43.

⑻ “회상은 하나의 인사함이다.” (EH 96) “인사함은 하나의 회상함 (An-denken)이다.” (EH 97)

⑼ 참조 M. Heidegger, Unterwegs zur Sprache (언어에의 도상에)(= US), Pfullingen 1975, 108.

⑽ 참조 EH 97, 103, 115/6, 123.

⑾ EH 116이하, 123. “시적으로 앞서 말해진 성스러움은 단지 신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간-공간만을 열 뿐이며 이 지구상에서의 역사적 인간의 거주 현장을 지시해준다.”(EH 114).

⑿ EH 123. “최고의 것”으로서의 성스러움에 대해서는 참조 EH 18, 104.

⒀ “회상함은 사유자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꼭 붙잡을 수 있기 위해 그 안에 자신을 붙잡아매고 있는 그러한 어떤 견고한 것을 그리워하며 사유하는 그러한 견고하게 함이다.”(EH 143)

⒁ EH 123. “고유한 것에 머물러 있음이란 샘물의 원천에로의 산책이다. 그 원천은 거기서부터 모든 지구상의 아들들의 거주가 유래해 나오는 그러한 근원이다. 머무름이란 근원의 가까이에로 걸어감이다.”(EH 145)

⒂ Hw 59.

(16) Hw 59, 62.

(17) Hw 64.

(18) Hw 61.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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