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7월부터 매 주 월요일 연재되었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이번 편을 끝으로 마감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생명학’과 ‘인문학’을 주제로 새로운 연재가 시작됩니다.
지난 1년 동안 귀한 신의 숨결을 나누고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기상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과 새로운 주제로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편집자 주
이문열이 『사람의 아들』에서 다루고 있는 변신론의 문제, 즉 죄 없이 고통받는 인간들이 허다한 모순적인 현실 앞에서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을 변론해야 하는 변신론의 문제는 그의 말마따나 인간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다. 누구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문제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판관의 전설」에서 인상 깊게 다루고 있다.
『사람의 아들』에서 이문열은 한마디로 「신 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를 민요섭과 조동팔을 등장시켜, 아하스 페르츠의 변론을 통해 실험적으로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카뮈를 일생동안 고심케 한 주제 역시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 죄 없는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가 받는 고통이었다.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직면해서 그 부조리를 온갖 의미로 치장하여 거짓 희망을 양산해 내거나 그 원망을 투사하여 저세상이나 초월신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시지프스처럼 그 부조리를 응시하며 그 부조리에 끝까지 반항할 것을 카뮈는 주장한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신 없이도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결혼』에서 “나의 왕국은 오직 이 세계뿐임”을 선언한다. 이렇게 볼 때 초월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육체를 가진 인간성에로 해방시켜 저세상이 아닌 바로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를 구현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은 카뮈의 실존철학적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카뮈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아리송한 신의 섭리와 은총을 들먹거리며 저세상에서의 구원을 구실삼아 비인간적인 고통의 상황을 참으라고 종용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자살」이라고 규탄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악령』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윤리도 도덕도 가능하지 않고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동물집단으로 변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에서 신(神) 없이도 윤리도덕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사람의 아들』의 핵심적 결론을 이루고 있다는 「쿠아란타리아서」를 보면 신 없이도 윤리도덕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신이 지상에서의 인간생활에 대해 아무런 분별과 간섭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선은 장려되고 악은 비난받을 것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리라. 그래야만 너희가 너희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므로. 도둑질하지 말라. 그러면 도둑 맞지 않으리라. 간음하지 말라. 그래야만 너희 아내와 딸들이 정숙하게 남게 될 것이다”(253)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선포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교리를 달리한다는 이유로 민요섭은 살해당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온갖 도둑질이 다 허용되고 있으며 육욕의 유혹에 약하다는 핑계 아래 남의 아내와의 간음도 자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문열은 신 없이는 윤리도덕이 불가능하며 그러기에 신이 요청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확신 있게 긍정할 만한 근거가 충분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 『사람의 아들』뿐 아니라 다른 작품 어디에서도 이문열이 신의 존재와 신에 대한 믿음을 확신있게 제시하고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는 차라리 조심스럽게 이문열이 카뮈처럼 「신 없이도 윤리도덕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암암리에 견지하면서 그를 위한 이론적 바탕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은 그를 위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이문열이 제기한 물음 「신 없이도 윤리도덕은 가능한가」는 대답이 안 된 채 열려 있는 셈이다.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진 현대의 신학자로서 우리는 한스 큉을 들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진다. 세속화와 과학화의 여파로 그리스도교는 끝장에 이른 것은 아닌가? 그와 더불어 또한 신(神)에 대한 신앙(信仰)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닌가? 종교라는 것에 장래가 있을까? 우리에게 종교 없이도 윤리도덕이 가능할까? 과학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종교라는 것은 마술에서 발전해 나오지 않았을까? 진화 과정에서 종교는 사멸하지 않을까? 신이란 애당초 인간의 투사이거나(포이에르바하), 민중의 아편이거나(마르크스), 파탄난 자들의 원한이거나(니체), 한사코 어린애로 남는 자들의 환상이거나(프로이트) 하지 않을까? 신학자들마저도 신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드디어 포기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왜 신을 믿는가? 왜 그저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믿는 데서 그치지 않는가? 자유, 인간애, 사랑 같은 인간적 가치만 믿지 않고 어째서 굳이 신을 믿는가? 어째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에다 신에 대한 신뢰를 덧붙이고, 우리가 하는 일에다 기도를, 정치에다 종교를, 이성에다 성서를, 지금 이곳의 삶에 후세를 덧붙이는가? 우리가 지닌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오늘날 그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⑴
그러나 한스 큉에게 그 대답은 분명하다. 신 없이는 윤리도덕이 가능하지 않다. 그는 그의 최근의 저서 『세계 윤리 구상』에서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종교가 없이는 윤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것만이 절대적 의무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만이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절대가 곧 인간과 세계의 근원, 근저 그리고 근본목표로서 우리가 신 또는 하느님이라 부르는 바로 그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둘러싼 신의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종교 간의 전쟁을 어떻게 중재해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한스 큉은 「종교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가 없음」을 역설한다. 그런데 진리의 물음에 대한 해명 없이는 종교들 사이에 어떠한 평화도 보장될 수 없다. 한스 큉은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를 가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근본기준으로서 모든 인간에 공통된 인간성을 든다. 참된 의미의 인간적인 것,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그리고 그 존엄성을 지향하는 근본가치에 의존하고 있는 근본기준을 제시한다. 즉 종교가 인간성에 기여하고, 자신의 교리와 윤리, 예식과 제도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신장시키며, 의미 깊고 풍요로운 실존을 가능케 한다면 그 종교는 참종교이고 선한 종교이다.⑵
이렇듯 신 없이는 윤리도덕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한스 큉도 신에 대한 믿음의 올바른 실천의 근본기준으로서 인간성을 들고 있으며 이때의 인간성은 인간의 기본 육체적인 권리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미한다. 이문열의 신에 대한 논의의 최종적인 귀착점이 인간성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 이후 작가 이문열이 보다 더 인간성의 궁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그 외의 다른 많은 그의 작품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철학은 카뮈 계통의 실존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문열이 다른 작품에서 「신 없이도 윤리도덕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⑴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94), 5 이하.
⑵ 참조 한스 큉, 『세계 윤리 구상』: 안명옥 옮김, (분도출판사 ,1992), 179 이하.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