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목요일(2020.7.23.) : 예레 2,1-3.7-8.12-13; 마태 13,10-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군중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그 여러 가지 비유를 13장에 한데 몰아서 비유설교로 편집하면서 제자들의 질문 형식에 답변하시는 형식으로 예수님의 비유가 지니는 숨은 의미를 일깨워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정상적으로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그나마 익숙한 현실에서 비유의 소재를 동원해서 하늘 나라의 현실을 일깨워주시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에게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주부들에게는 누룩의 비유를, 양치기들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상인들에게는 진주의 비유를, 어부들에게는 물고기나 그물 또는 사람 낚는 어부의 비유를, 노동자들에게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드신 것이고, 도무지 자비를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르며 재물에 인색하기만 했던 바리사이들에게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나, 무자비한 임금의 비유라든가, 탈렌트의 비유 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비유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영적인 귀로 들을 수 있어서 깨닫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서부터 그 현실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성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대단히 강력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 전체에 대해서 마치 친한 벗을 부르듯이 의인화된 이름, ‘예루살렘’ 혹은 ‘이스라엘’로 부르면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젊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하고, 농사에서 얻는 수확의 맏물이나 기름진 땅으로도 비유하면서 얼마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셨는지를 상기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전하고자 하는 예언 메시지의 핵심, 즉 이스라엘의 죄상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결론으로 전해준 하느님의 심판 말씀이 이러하였습니다.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복음과 독서의 말씀을 한데 모아서 보면, 결론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아야 실제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나 예수님 당시에나, 임금이든 예언자든 사제든 또는 여러 가지 직업으로 살아가거나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봉사하던 개개인들이든 자신들은 나름대로 정상적으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케스트라의 비유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그리고 건반악기 등 대단히 다양하고 많은 악기 연주자들이 악보에 따라 연주하면서 화음을 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자의 지휘에 따르는 데 있습니다. 만일 개별 연주자가 자신이 다루는 악기 연주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지휘를 보지 않고 악보만 보고 연주하다 보면, 전체 화음이 맞지 않고 어긋나버릴 수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학문인생 말년에 펴낸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 전체가 병들어 있는데, 혼자서만 정상이라면 그는 결코 정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정상성은 병리적 사회에 적응된 정상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모두가 외눈박이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면 외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으로 간주될 것이지만, 두 눈을 가진 외계인이 그 세상에 들어가서 보면 그 외눈박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외눈박이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장애자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가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죄상 가운데에서, 사제들에 관한 부분이 유난히 제 눈에 뜨입니다.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시대와 그 사회에 보여주시는 징표를 식별하려 들지 않았다는 뜻이겠고, 식별도 하지 않았으니 동시대인들에게 전달하지도 못했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회가 될 때마다 경고하시듯이 말씀하시는 ‘성직주의’ 또는 사제들의 ‘영적 세속성’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관행이나 소속 집단의 이해관계에는 충실할지 모르나, 전체 교회나 세상 사람들의 기대 관점에서 보기에는 복음적으로 부족한 모습을 두고 하는 말씀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