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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한 이유, 나라를 세우는 길
  • 이기우
  • 등록 2020-08-24 11: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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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2020.8.23.) : 이사 22,19-23; 로마 11,33-36; 마태 16,13-20



나라를 세우는 길 하나: 최고선을 세워라


연중 제21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중대한 결의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습니다. 그 나라의 이름은 하느님 나라이며, 그 나라를 세울 주역들로 이미 부르신 제자들 앞에서 총책임자로 베드로를 지목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다만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예수님부터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며,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 수난을 겪어야 하기에 당신이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라는 사실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는 이 나라를 세울 수 없으므로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는 섭리만큼은 철저한 비밀에 부치고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사실과 섭리를 합쳐 메시아 비밀사상이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을 죽기 전에도 미리 살아가는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 현세적 차원을 살아가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가치로써 살아가는 것이기에, 이기심과 탐욕에서 죽고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기본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오신 그분의 아드님으로서 공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당신께서 지니신 권능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믿는 이들이라면 사람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존재들인데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특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말씀과 처신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혼자만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삶에 관한 이 계시는 최고선에 속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회적 차원에서 공동선에 관한 윤리를 파생함으로써 세상의 나라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최고선에서 나오는 공동선의 윤리를 무시하면 나라가 망하고, 존중하면 흥합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하나: 일제의 침략


오는 토요일 8월 29일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날입니다.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였다 해서 이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합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이름이 대한제국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이래 519년만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왕조 역사가 5백년이나 유지한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가 무너져 나라까지 멸망시킨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일제의 침략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일제가 총칼로 강요한 한일강제병합은 국제법상 원천 무효입니다. 국제법상 조약이 유효하려면 ▲조약 당사자가 조약을 체결할 능력이 있어야 하며, ▲조약체결을 하는 대표자가 정당한 권한을 가져야 하고, ▲조약체결 대표자간 하자 없는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하며, ▲조약의 내용이 가능하고 적법해야 하고, ▲조약이 국내법에 위반하지 않는 절차에 따라 체결돼야 한다는 5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일강제병합 조약은 대표자가 조약체결권이 없었으며 대표자에 대한 강압이 있었으므로 의사 합치에 하자가 있었고 비준 절차가 없어 국내법까지 위반한 것입니다. 특히,  순종황제가 일제와 매국 내각에 압박을 받았으므로 '대표자에 대한 강압'이라는 심각한 하자가 의사 합치 과정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둘: 지도층의 무능


그렇지만 국가의 유지·운영을 책임진 군주와 대신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제5조는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인데, 이토 히로부미가 갖고 온 것은 4개조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5조는 대한제국 쪽에서 요구하여 들어간 내용인 겁니다. 국가의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안녕하고 존엄을 유지하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이 망해가는 나라의 대신들 생각이었던 겁니다.


‘병합조약’도 다르지 않습니다. 8개조 중 제1조와 2조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머지 5개 조항은 나라를 넘겨주는 대가로 되어 있습니다. 즉 황제·태황제·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그리고 전·현직 대신들은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등을 지급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일제는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마 속으로 비웃으면서 이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지급하였을 겁니다. 결국 황실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대가를 받고, 5백 년이 넘는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친일행적으로 누린 권세로 해방 이후에도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는 친일파 후손들을 공동선의 책임을 지는 공직에서 철저하게 배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셋: 성리학과 소중화주의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중시했는데, 여러 학문 중에서 정책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서 중시한 정도가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오류로 배격했습니다. 성리학을 우상으로 숭배한 셈입니다. 성리학을 독점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다 보니 성리학의 본산인 중국 문명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와 우리 고유의 문명을 얕잡아보는 폐단이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이념과 명분을 조선에서 계승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소중화의식(小中華儀式)’으로 치닫는 바람에 청나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해 스스로 폐쇄적인 벽을 쌓는, 국제적 고립까지 자초했습니다. 우상숭배의 한심스런 후과(後果)입니다. 이런 폐쇄적인 학문의 감옥 상황에서 이 땅의 선각자 선비들이 천주학을 들여와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운 일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요 매우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넷: 국가의 지식 독점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점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책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었지만, 지식을 널리 퍼뜨리려는 의지가 약했습니다. 지배층은 권력의 원천인 지식을 독점하길 희망했으며 책이 필요한 관리들은 나라로부터 책을 하사 받으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굳이 서점이 없더라도 그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입니다. 


그 한 예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반계(磻溪) 유형원의 역작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드러난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해서, 토지 및 조세제도, 인재 선발과 교육제도, 노비제도, 군사 및 행정제도 등 정치 및 경제의 핵심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정책제안을 담고 있던 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선을 논하는 서책 하나가 세상에 발간되어 나올 때까지 100년이 걸렸습니다. 지식을 독점해 오던 지배층 선비들에게서는 지식 유통의 의지는 물론 나라의 공동선에 대한 책임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다섯: 책임을 묻지 않는 정치


조선의 지배층은 생각보다 무책임했습니다. 위정자들의 준비 부족으로 임진왜란을 겪어 국토와 백성에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그 누구도 책임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상도 엉망이고, 벌도 멋대로였습니다. 이 당시 수군통제사로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역적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매질까지 가했던 당시 임금 선조의 치졸한 행적이 이 한심한 현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이런 제도 하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해 먹는 폐쇄적 제도가 문제였습니다. 결국 포용 정신이 더욱 사라졌고, 당쟁은 격화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 여섯: 천주교 박해


이러한 폐단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에 성리학에 경도된 지배층의 지식 독점망을 뚫고 오묘하게 천주교의 교리가 조선에 들어왔는데, 지배층은 폐단을 개혁하거나 천주교에 의한 사회 개혁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나라를 개혁하고 정책을 혁신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씨를 말릴 생각에만 골몰했습니다. 그 기간이 1789년 추조적발사건에서 시작하여 1896년 조불통상수호조약에 이르기까지 무려 백 년입니다.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교리를 믿던 신자들은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을 주장하면서 신분차별을 철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18년 동안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국가 개혁 과제를 여유당 전서 5백여 권으로 정리해서 민간에 전파했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 동학혁명이 일어났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엉뚱하게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 진압하고자 했지만,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 일본군대가 동학교도들을 전멸시키는 웃지 못 할 촌극이 조선 말기의 상황이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길 둘: 공동선을 확립하라


이상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야 했던 이유들은, 일제의 침략, 지도층의 무능, 성리학과 소중화주의, 국가의 지식 독점, 책임을 묻지 않는 정치, 천주교 박해 등 죄다 사회의 공동선을 튼튼히 하지 않고 소홀히 했던 이유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국력이 피폐해지니 일제가 침략한 것입니다. 공동선의 과제 중에는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공유화가 있습니다. 


또 학문과 사상 그리고 언론과 종교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자유롭고 공정하게 기능하면서 그 성과들이 얼마나 공동선에 기여하는지의 여부가 투명한 경쟁의 장에서 공론화되어야 하는 과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정치의 민주화가 진척되면 주권자의 뜻과 위임에 따라 자주국방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을 비롯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실천을 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 이행의 과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길과 올바른 나라를 세우는 길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선을 확립하는 것이며, 올바른 나라는 공동선을 확립하는 것이 다를 뿐, 서로 경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최고선이 더 중요합니다. 최고선이 확립되어야 공동선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이기는 하지만 갈라진 겨레를 다시 화해시키고 통일시킬 수 있게 해주는 부활의 길인 동시에, 하느님 나라와 새 나라를 동시에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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