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생명’과 학문 속 ‘생명’의 뜻 새김
시골에 살다 보면 봄이 생명의 계절임을 더욱 절감한다. 한 겨울 모든 것이 얼어 죽은 것 같았던 화단과 앞마당에 4월이 되면 여기저기서 녹색의 생명이 땅을 뚫고 올라온다. 보라색의 매발톱, 금낭화, 루피너스, 황금조팝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얼굴을 비집고 나오며 저마다 살아있음을 뽐낸다.
흙을 뒤집다보면 꿈틀거리는 지렁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울타리 주변 잡초를 제거하다가 봄빛을 받고 돋아난 두릅나무 새순을 발견하기도 한다. 뜻하지 않은 수확에 감사하며 부드러운 솜털로 뒤덮인 연초록의 새순을 따다가 살짝 데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명과 더불어 사는 삶은 몸과 마음 모두를 활기차게 만든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들 모두가 다 생명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묻고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도 우리가 생명이기에 가능하다.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체험한다거나 보고 느낀다거나 하는 식의 대상화하는 어법이 오히려 낯설 지경이다. 생명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가 생명 자체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생명을 보고 느낀다. 그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은 가장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살아있는 생명체의 하나이며 매일같이 우리 주변에서 온갖 종류의 다양한 생명체들을 보고 대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굳이 ‘생명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그 자명함 속에서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철학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에도 비슷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생명이 워낙 자명한 사실이라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나름대로 알게 모르게 생명의 사실을 전제하고 그 바탕 위에서 각기 나름의 철학이론을 펼쳐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생명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20세기 말부터는 생명이 가장 중요한 우리 시대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생명의 본질은 ‘사름’이다
그러면 생명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며 이해되고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생명은 일반적으로 “목숨을 지니고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목숨’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목숨’은 “숨을 쉬며 살아가는 원동력”을 말한다. 목숨을 지니고 있음은 목숨이 떨어져 나가 죽어버린 것이 아닌 상태, 곧 ‘살아있음’이다. 따라서 살아있음의 상태를 지칭하는 생명은 죽어있음과는 대비되는 상태를 말한다. 죽은 것과 산 것을 구별 짓는 기준이 목숨이며 생명이다.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물체라 해서 생명체 또는 생물이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것은 여기서 어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물체, 즉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이때 죽은 것 또는 순전히 물질적인 것(무생물)과 생물을 구별해 주는 생명의 징표는 무엇보다도 ‘움직임’, ‘꿈틀거림’, ‘운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명체는 남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움직인다. ‘자기운동’이 살아있음의 표징이다. 자기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활력원을 자신 안에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 안에서 열(에너지)을 만들어내어 힘으로 바꾸어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열과 힘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태우는 것을 우리는 ‘사른다’고 한다. 자기운동을 하는 생명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태우고 살라 열돌이와 힘돌이를 유지하는 ‘사름’으로 살고 있다. 삶은 사름이다.
생명은 죽음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을 수 없는 것은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생명은 죽음에 의해 테두리 쳐지고 죽음에 의해 규정받는다. 생명에서의 ‘생(生)’자는 ‘살 생’일 뿐 아니라 그 보다 앞서 ‘날 생’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다 언젠가 새로 생겨난 것들이다. 또한 언젠가는 그 목숨을 다하고 결국에는 죽을 것이다. 생명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이다. 그래서 생명에는 살아있는 기간이라는 의미의 ‘수명’이라는 뜻도 있다.
‘날 생’의 의미를 갖고 있는 생명에는 ‘태어남’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낳음’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태어남이 있기 위해서는 낳음이 있어야 한다. 삶이 죽음으로 테두리쳐 있음에도 죽음을 넘어 삶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방책이 있어야 한다. 생명체는 바로 그 해법의 신비를 자신 안에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낳음과 태어남의 겹구조이다. 낳음을 받은 나는 생명의 마당에 참석하여 생명의 놀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죽음이 나를 덮치기 전에 또 하나의 다른 나를 낳아야 한다. 낳음을 통한 생식의 사건이 없다면 생명은 죽음에 의해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해 묻고, 삶의 이유를 깨닫자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기간을 생명체는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살아있음이라는 생명의 의미는 ‘살아감’이라는 지속과 과정의 뜻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정한 기간 동안의 삶의 지속과 과정을, 다시 말해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살아가는 동안을 흔히 간략하게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때를 살아가면서 섭취·소화·발육·성장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한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생명체는 동일한 자기임(자기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으로 통한다. 이러한 삶은 일정한 때-사이에 의해 한정될 뿐 아니라 또한 공간[빔-사이]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다. 모든 생명체는 물체를 가진 존재자로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살다’라는 말에는 ‘거주하다, 거처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열거한 넓은 의미의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살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살다’는 숨을 쉬며 자신의 생명의 원동력을 끊임없이 ‘살라’ 목숨을 이어 나감을 뜻한다. 목숨의 불꽃을 사르면서 삶 속에 머무르려 애쓰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보존하려 버둥거린다. 생명체의 살아있음 또는 살아감은 우리가 흔히 자연 현상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변화와는 다르다. 생명체에서 우리는 삶의 구심점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살려는 ‘의지’를 우리는 자기자신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변화의 축을 자신 안에 두고 스스로를 움직이고 자신을 보존하려 애쓰며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 환경에 신경 쓰며 그에 적절하게 대처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계속 바꾸어나가면서 쇄신하고 갱신하고 향상한다.
생명체에서 우리는 이러한 자기운동, 자기보존, 자기변화, 자기쇄신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체는 이 ‘자기’를 자신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물질적 ‘여기와 지금’에 국한하지 않고 ‘종(種, Gattung, art)’의 형태로 계속 유지해 나가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무생물과 비교할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생물이 갖고 있는 바로 이러한 자기복제의 능력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그가 그의 생활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며 대하는 구체적인 생명체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신비한 생명의 힘에 감싸여 있음을 느낀다. 이 땅 자체가 살아있음을, 아니 이 우주 자체가 살아있음을 몸으로 경험하며 산다. 존재하는 것은 곧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태어나 살다가 결국에는 죽어버림을 확인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구체적인 생명체는 생명력을 부여받아 살아가다가 그 생명력이 다하면 죽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구체적인 생물들로 하여금 살아있게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종을 퍼뜨려 계속 살아남게 하는가? 인간은 이렇듯 생명현상을 대하면서 ‘생명’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물음은 똑같이 던졌지만 문화권과 세계상에 따라 물음을 대하는 태도와 대답이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도 다름을 동서양의 서로 다른 생명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읽어내는 한국인의 생명관
그러면 한국인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세계관과 인간관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자.
영어의 ‘life’ ― 라틴어의 ‘vita’, 불어의 ‘vie’, 독일어의 ‘Leben’ ― 를 우리말로 대개 ‘생명’[또는 ‘생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이 일상생활에서 말하며 쓰는 ‘생명’이라는 말에는 그런 단어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이 풍겨 나온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명이라는 글자를 풀이해보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감 잡을 수 있다. ‘생명(生命)’에서 ‘생(生)’이라는 글자는 ‘땅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 글자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의미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과 땅의 큰 힘을 받고 땅을 뚫고 하늘을 향해 새싹을 틔워 그 사이에 존재하게 됨’이다. 생명에서 ‘명(命)’이라는 글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명(命)’은 ‘입 구(口)’ 자와 ‘명령할 령(令)’ 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령(令)’ 자는 관청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한다. 관청에서 높은 사람이 하늘에서 명 받은 것을 선포하는 것이 ‘령(令)’인데, 모든 명령 선포가 입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점을 분명히 하여 ‘입 구(口)’ 자가 덧붙여졌다고 한다. 따라서 ‘명(命)’ 자의 의미는, 높은 사람이 관청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로부터 령(令) 받은 것을 말하여 선포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명(命)에는 명령의 의미, 천명의 의미, 운명의 의미 등이 담겨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천명(天命, 하늘의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이라는 우리말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큰 덕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나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살아있게끔 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늘의 명을 받은 ‘생명’들로서 하늘과 땅의 힘돌이와 열돌이, 숨돌이와 피돌이에 참여하고 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면서 천지만물과 더불어 지구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함을 명령받은 살림지기로서 모든 생명체에서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신비로운 생명의 사건에 ‘사이 존재’로서 책임감을 갖고 동참해야 한다.
<우리말과 일상에서 읽어내는 ‘생명’의 의미>, 『경향잡지』 2012년 6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