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2020.09.06.) : 에제 33,7-9; 로마 13,6-10; 마태 18,15-20
연중 제23주일인 오늘은 순교자 성월에 맞이하는 첫 주일입니다.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느덧 다가오는 가을의 기운이 아침저녁으로 느껴집니다. 유난히 하늘이 높아보이는 이 가을에 우리는 이백여 년 전에 천주교를 통해 진리를 깨달은 신앙 선조들이 본 하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동족의 죄와 악을 경고해야 할 책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불리운 공동체이기 때문이고, 죄와 악은 이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화려해 보이는 우상에 빠져서 하느님의 계명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제물을 바쳤으며, 동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는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급기야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은 금이 가버렸고 공동의 선이 흔들리자 나라의 국력은 쇠약해져서 힘센 아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오기도 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쫓겨간 바빌론에서 에제키엘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아 벌을 받은 동족 대신 후손들이라도 자신이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예언서를 썼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사도가 된 바오로는 20여 년 동안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끝에 마지막 일정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 일정이란 당시 유럽 대륙의 남부와 아시아 대륙의 서부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북부 등 지중해 일대를 제패했던 로마 제국의 중심부로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야심찬 선교계획이었습니다. 이미 로마에는 여러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에 바오로는 그들의 신앙을 믿고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율법은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계명이지만, 이 율법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율법이 완성됩니다.”
에제키엘이 전해준 바 이스라엘이라는 단일한 혈통의 폐쇄적 공동체에서 일단 시작된 공동체의 기운과 질서가 바오로로 인하여 그리고 로마 제국이 닦아 놓은 문명적 기초와 정신적 환경을 딛고 이제 전 세계로 보편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상대방이 그 사랑의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를 짓게 될 경우의 대책에 대해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무려 세 번이나 상대방이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충고하기를 가르치셨습니다. 처음에는 단 둘이 만나서 타일러보고, 안 되면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충고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서 충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삼 단계의 노력에 대한 가르침 속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적 일치를 얼마나 바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죄를 지은 신자를 용서하든 또는 죄를 지은 신자가 자기 죄도 인정하지 않아서 용서하지 않든, 예수님께서는 그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공동체의 일치가 깨지느냐 혹은 봉합되느냐의 갈림길에 선 순간뿐만 아니라 평소에 다반사로 일어나기 마련인 갈등에 있어서도 땅에서 풀든 매든 하늘에서 그에 부응하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엄청난 위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렇듯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에 제자들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주신 예수님의 방점은 죄나 잘못을 용서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한 일을 하려는 제자들의 기본 지향을 믿어 주시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동체에 해로운 죄를 막아내는 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선한 과제에 전폭적인 위임을 주셨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을 이처럼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할 수 있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체’라는 시대의 화두를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던져 주었고, 이렇게 되기까지 공의회의 교부들에게 ‘공동체’라는 개념을 일깨운 사상가들 가운데에는 앙리 베르그송과 떼이야르 드 샤드뎅의 삶과 업적이 독보적이었습니다.
19세기 중엽과 말엽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톨릭 지성인들의 시야를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앙리 베르그송은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습니다. 과연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져 왕성한 학술활동을 벌였습니다.
동 시대의 자연과학의 실증적 성과들을 수용하면서도 동 시대의 철학의 경험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에 입각한 직관에 기반을 두어, 과학과 철학을 모두 아우르는 학문 전반의 성과를 종합하여 생명현상을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생명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화한다는 가설을 세웁니다. 물질에서 유기체, 유기체에서 생명체, 생명체에서 다시 의식을 갖춘 인간으로 진화된 존재인 우리는 열린 도덕, 열린 종교, 열린 사회로 진화해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한 앙리 베르그송이 평신도로서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학문에 담았다면, 가톨릭 신부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지질학 및 고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실증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신앙의 우주적 시야를 열어젖힌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앙리 베르그송이 주창한 창조적 진화의 개념을 더 발전시킨 샤르뎅은 16세기 이후 개인 구원관에 매몰되어 있던 가톨릭 신학을 구원과 해방이 동의어임을 입증함으로써 신학이 사회성을 담보하고 공동체적 관점을 견지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앙리 베르그송이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꾀했다면, 샤드뎅은 유물론과 유신론의 통합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저작이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된 것처럼 샤르뎅의 저서도 금서로 지정되었고 연구와 강의를 정지당했으며 미국으로 강제 유배된 채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시야가 좁고 신앙의 깊이도 얄팍한 교황청 고위 관료들의 폭력이 이러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두 학자 모두 가톨릭교회 바깥에서 더 인정받는 대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현실이 한때나마 이 두 대학자의 학문을 단죄하려 했던 교황청 관료들의 몹쓸 행태를 부끄럽게 합니다.
고대와 근대, 과학과 철학, 유물론과 유신론 등 모든 인류 지성과 학술적 대화를 시도했던 이 두 학자의 학술적 업적으로 인하여, 고대에 출현한 성현들 즉 붓다, 공자, 예수는 공통적으로 이미 기원전 시대에도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생물에서도 일어나고 인간에게도 일어난다”고 깨달았음을 동 시대의 지성인들이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소멸되는 개별 생명체들을 성령의 힘으로 진화시켜 거대한 역사의 생성작용을 지속하고 계시고 그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이것이 부활의 진화적 측면이라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공동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색, 과학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통찰의 발단이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이며 그 종점이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인간 생명 현상을 시대적으로나 분야별로나 종합적으로 연구한 이 두 대학자의 사색에 힘입어 인간의 정체성은 진화과정의 특성을 반영하듯이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 뿌리가 하느님께 닿아 있기에 열린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관계성을 은총으로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 중에 자신의 존재와 창조주의 존재를 아는 의식을 갖춘 피조물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계획은 인간이 당신을 닮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저 광대무변한 대우주를 조성하셨고, 수없이 많고 많은 별들 중에 유독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셨으며,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창조주를 닮을 수 있는 지적 능력으로서 의식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으로 말미암아 대우주의 신비를 관찰하는 한편 인체의 신비가 또한 대우주의 원리와 상응하는 소우주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대규모의 우주와 소규모의 우주 사이에 중간 규모의 우주, 즉 공동체뿐입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비록 둘이나 셋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루는 삶의 질과 수준은 인류 문명이 받쳐 주고 도덕 종교가 이끌어주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천국을 이룩할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라는 또 다른 우주의 질서입니다.
이를 ‘중간 규모의 우주’ 즉 중우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중우주로서의 작은 공동체들이 무한대로 서로 연대하고 통공을 이룰 수 있을 때, 통공의 신비가 천상과 지상에서 이루어집니다. 마치 어마어마한 전압을 간직한 마이너스 구름과 플러스 구름이 맞부닫치면 번개가 내리치고 벼락이 울리듯이, 인류의 역사가 겉보기에는 자그마해도 본질적으로는 엄청난 진보의 속도로 진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이룩하는 공동체의 위용이 이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땅의 작전에 하늘에서도 조응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고, 땅의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를 받아서 더 크게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컨대, 정체성은 관계성과 맞물려야 온전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없이 고립된 개인은 그 정체성이 완벽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로 관련이 지어진 채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인간으로 양육을 받으며, 교회로 인도되어 신앙인이 되는가 하면, 서로 사랑하는 진리를 삶에서 이룩하도록 교육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에로 진화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천주교 서적을 통해 이 같은 진리를 접한 신앙 선조들은 책에서 본 하늘을 교우촌에서 이룩했으며, 치명의 기회가 주어지면 사형장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하늘로 옮아가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땅에서 새로운 하늘을 이룩하여 공동체로 진화하라고 재촉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