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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6월 26일
  • 국방그라시아 수녀
  • 등록 2015-07-02 11:31:32
  • 수정 2015-07-02 11: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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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병 환자는 마음속에서 예수님께 다가가고 싶은 원의를 느끼고 용기를 내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외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는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서 다가가면서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단순하게 자신의 청을 드렸던 거예요. [...]


하지만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님을 미끄러지게 하여 단죄하려고 항상 그분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와 달리 나병 환자는 자신이 깨끗하지 않고 병이 들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를 만지지 않고 그저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가까이 있기”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가까이 있지 않고는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 있지 않고는 평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다가가지 않고는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말로 “나아라!!” 하실 수 있었지요. 그런데 아니에요. 다가가셔서 그를 만지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자를 만지시는 순간에 부정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당신이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똑 같은 분이시면서도 이 신성을 포기할 수 없는 재화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게 낮추셨습니다.” 또 바오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죄가 되셨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죄가 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배제되셨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해 당신 자신 위에 부정함을 짊어지셨습니다.


저는 손을 더럽히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더럽히십니다. 가까이 다가가기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더 나아가십니다.


그 사람에게 “사제에게 가서 나병 환자가 병이 나을 때 해야 하는 바를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지요. 사회생활에서 배제되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포함하십니다. 곧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고, 사회 안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가거라, 모든 것이 제대로 되도록.” 예수님은 결코 아무도 소외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결코.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들이시려고, 우리를, 죄인들을,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들이시려고 당신 삶으로 당신 자신을 소외시키시지요. 이건 아름답습니다.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나병 환자에게 있었던 용기가 없어서, 하지만 다가가고 싶은 커다란 원의를 가졌기에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지요! 그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 우리 중 하나가 되시면서, 우리처럼 되시면서 당신 존재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죄가 없이 우리 같은 죄인이 되셨고 우리 죄로 더러워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다가가기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 다가가기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나는 다가갈 줄 압니까? 소외된 사람들을 만질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까?


교회와 본당과 공동체들에게 있어서도, 축성생활자들과 주교들과 사제들과 모두에게 있어서도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다가갈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항상 거리를 두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거리를 좁힐 용기가 있는가?”

[...]


덧붙이는 글

국방그라시아 수녀 : 성심의딸 수녀회 수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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