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자선기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하여 런던 첼시의 고가 부동산을 매입하고 고의적으로 교황청 재정에 손실을 입혔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교황청 고위직 추기경이 사퇴했다. 예상치 못했던 이번 사퇴 소식에 외신들은 모두 이례적이라고 지적했다.
교황청 공보실은 24일, 별도의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시성성 장관 안젤로 베치우(Angelo Becciu) 추기경의 장관직 사퇴가 수리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매우 이례적으로 “추기경 직분과 연계된 권리 반납도 함께 수리되었다”고 발표했다. 추기경은 대표적으로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에 유권자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면직 또는 환속(laicization)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추기경이 자신의 직분을 스스로 내려놓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역사적으로는 1927년 프랑스의 루이 비오(Louis Billot) 추기경이 교황 비오 11세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추기경 직분을 내려놓았다. 2015년에는 성범죄 의혹을 받고 있던 키스 패트릭 오브라이언(Keith Patrick O’Brien) 추기경이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추기경 신분은 유지했다.
이번 사퇴는 이탈리아 일간지 < L’Espresso > 가 교황청 내부조사 내용을 입수해 베치우 추기경이 2011년부터 2018년 국무원 국무장관 재직 당시 교황성금으로 불리는 베드로 성금을 편법적으로 유용했고, 큰 손실을 입은 런던 부동산 투자가 베치우 추기경의 조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한 직후 이루어졌다.
베치우 추기경이 의혹을 받고 있는 부분은 런던 첼시의 슬론 에비뉴에 위치한 고가 부동산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베드로 성금이 사용되었고, 그 결과로 교황청이 최소 2억 유로(한화 2,600억 원 가량)의 손실을 입은 부분이다.
베치우 추기경의 교황청 측근들은 이 의혹으로 인해 직위해제 되거나 압수수색을 당했고 추기경은 이러한 자금 조달의 기획자로 의심받아 왔다. 이에 대해 그는 “중상모략”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은 이미 내부감사를 통해 “불투명했다”고 밝히며 의혹이 신빙성이 있다고 발언하는 등 내부적으로도 사실상 혐의가 짙어지고 있었다.
교황청 런던 부동산 의혹을 2019년부터 보도해온 < L’Espresso >는 이번 보도를 통해 베치우 추기경이 조직적으로 교황청 재정을 친분이 있는 투자사와 가족 사업에 유리하게 활용한 구체적 정황을 확인했다. 해당 일간지는 이번 사건이 “베치우식” 횡령이라며 “이번 사건은 일회성 사건이 아닌 안젤로 베치우 추기경의 지휘를 따르던 국무원만의 (자금 유용)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교황청은 자체 조사를 통해 베치우 추기경이 재정전문가 및 자기 형제와 함께 조직적으로 교황청 자금을 유용한 사실을 확인했다.
먼저 베치우 추기경은 토니노 베치우(Tonino Becciu) 사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이탈리아 오지에리(Ozieri) 교구 카리타스 산하 협동조합에 이탈리아 주교회의와 베드로성금을 통해 3차례 총 70만 유로의 지원금을 수령하는데 개입했다.
이어서 앙고라와 쿠바에서 베치우 추기경이 교황대사로 재직할 당시 프란체스코 베치우(Francesco Becciu)가 대표로 있는 목공회사는 해당 지역의 다수 성당 공사 계약을 따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유형의 불공정 계약에 대한 감시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 살레시오 대학 심리학 교수 마리오 베치우(Mario Becciu)가 95%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호텔음료 납품업체는 베치우 추기경과 그의 측근들을 통해 공식 계약 없이 이탈리아 카리타스 등과 같은 교회 단체에 음료를 납품하여 고정 수익을 내고 있었다.
베치우 추기경은 특히 국무원 내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측근을 챙기거나 교황청 재정을 투기에 쏟아 부었다. < L’Espresso >는 교황청 증권 포트폴리오 문건을 공개하며 런던 부동산 구매 역시 측근 재정전문가를 이용해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런던 부동산 인수를 주도한 이탈리아 투자사 발뢰르(Valeur) 출신 전직 컨설턴트는 투자사 고위관계자 2명을 “런던 부동산 사태의 주인공들”이라고 증언하며 이들이 베치우 추기경과 함께 교황청 재정을 유용하여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한 부동산에 의도적으로 투자했다고 지적했다. 일간지는 교황청이 런던 부동산으로 입은 손해가 4억 5400만 유로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 L’Espresso >는 이번 사건을 두고 “과거에도 이와 같은 방식의 사건이 존재했으나 이번에는 내부감사를 통해 조사와 체포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다르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새로 도입한 공공계약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베치우 추기경은 사퇴 직후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사퇴는 런던 부동산 투자사건 때문이 아니라 이탈리아 타교구에서 카리타스 산하 협동조합에 지원한 금액과 관련해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며 “교황께서 오해가 있었음을 하루빨리 아시기를 바란다”고 반박하며 관련 조사에 응하여 사태를 소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