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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하는 까닭 - [이신부의 세·빛]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0-06 16:21:29
  • 수정 2020-10-06 16: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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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화요일(20.10.06.) : 갈라 1,13-24; 루카 10,38-42 



우리 속담에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꿈에서 나타난 언짢은 일을 그럴듯하게 풀이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속담에서 중요한 것은 ‘꿈’이나 ‘해몽’이라는 명사보다도 ‘보다’라는 비교급 조사입니다. 그 이유는 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실제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인 갈라티아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해석하는 가운데 유다교식 할례와 율법에서 그 공동체의 교우들을 해방시켰던 자신의 현재 행적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성 사도들이 보낸 얼치기들이 바오로의 그 의미심장한 이방인 선교를 훼방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 해석과 변호 행위는 갈라티아 공동체와 그 교우들은 물론 미래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절친한 벗이었던 라자로의 집에 제자들과 함께 들르셔서 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타니아에 있던 그 집에는 라자로만이 아니라 그의 두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가 함께 복음 선포 일정에 지친 그분 일행을 맞이해 주곤 했는데, 장정 열세 명이나 되던 그 일생의 음식 시중을 곧잘 해 드렸던 마리아나, 말씀을 잘 들어드렸던 마리아나 둘 다 예수님께 필요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하는 루카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몫을 더 챙기시는 듯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음식 시중을 들던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까지 자신을 도와서 시중을 거들게 하려 들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말씀으로 완곡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분과 그 일행에게 정말 필요했던 일은 잘 쉬는 것이지요. 잘 쉬자면 먹을 것도 필요하지만 왜 쉬러 와야 했는지 이해해 주는 일도 필요한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 도움도 많이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믿음을 표명하는 이들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은 마치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처럼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병이나 장애를 고치려고 들거나 그 신기한 기적을 구경하려고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서는 배도 고프셨겠지만 말씀도 고프셨습니다. 당신의 진실을 알아주는 귀가 필요하셨다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기 어려운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보다는 많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분 발치에 앉아 잘 들어주고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중 앞에서는 긴장스럽게 선포를 하셔야 했던 예수님께서, 마리아 앞에서는 긴장을 푸시고 선포하신 그 말씀에 대한 풀이를 마음 놓고 편히 하셨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당신의 꿈을 해몽해 주는 시간이었던 셈입니다. 


민중의 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문학 소재입니다. 영국에 나니아 연대기가 있다면, 한국에는 심청전이 있습니다. 심청이는 앞을 못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중이 요구한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데, 그 효심에 감동한 하늘이 물에 빠진 심청이와 용왕을 만나게 해 준 덕분에 황후가 되고 맹인 잔치를 벌여 맹인 아버지를 찾았고, 딸과 재회한 기쁨에 심 봉사도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름 미상의 작가가 대변한 백성의 희망과 상상력이 나니아 연대기와는 사뭇 다르지요? 효성을 강조한다는 관점을 떠나 그리스도 신앙의 눈으로 다시 이 작품을 해석해 보자면, 당시 조선 시대에 민중의 눈에 비추어진 종교의 모습은 부정적이다 못해 절망적입니다. 다리를 건너가던 심 봉사가 발을 잘못 디뎌서 물에 빠졌는데, 그를 구해준 몽운사의 화주승이 자기 절의 부처님이 영험하다고 하면서 공양미 3백석을 바치라고 꼬드겼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그 가난한 살림에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고민하던 심청이는 인당수에 바칠 인신제물을 구하던 무역상인들의 돈으로 공양미 살 돈을 마련하기는 하지만, 심 봉사는 그 영험하다는 부처님의 도력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의 도움이었다고 작가는 해석을 했습니다. 세상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지요. 


이 작품에 묘사된 심 봉사와 심청의 처지는 당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아버지는 눈이 멀었으니 집안은 가난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심청이를 낳자마자 죽어서 눈먼 아버지가 심청이를 업고 다니며 동네 젊은 아낙들한테 젖동냥을 구걸해서 아이를 키워야 했고, 겨우 심청이가 일을 할 나이가 되었으나 일거리가 없어서 삯바느질로 연명을 하던 형편에서 아버지가 다리를 헛디뎌 물에 빠지지 않나, 겨우 구해 주었다는 중은 목숨을 팔아야 겨우 마련할 거금을 공양미로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작자가 미상인 이유도 도탄에 빠진 백성을 착취하던 종교를 고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백성의 꿈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당시 조정과 종교와 사회를 고발하면서 하늘이 도와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심청전을 다시 써 내려 가고 싶은 것이고, 적어도 그 해석이라도 다시 하고 싶은 겁니다. 꿈보다 해몽이니까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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