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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에 통달하라 - [글로벌인문학] 3 : 진정한 ‘통(通)’은 막힘없이 흐름이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1-02 12:34:57
  • 수정 2020-11-01 10: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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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우리는 대통(大統)이 아닌 소통(疏通)을 원합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 변호인 >은 한국 영화사상 9번째 1,000만 영화였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특정 사건과 역대 대통령을 신화화했다는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개봉 이후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상식’과 ‘공감’이 통했다는 내용이 많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은 맞지만, 정치인을 미화하거나 관객들을 선동하는 코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무엇에 공감했을까? 필자는 이 대목에서 영화 < 변호인 >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공판 장면이 떠오른다. 법정에서 용공 조작 사건으로 누명을 쓴 대학생들을 변론하는 송우석 변호사가 검사와 피고인을 향해 던지는 대사는 지극히 상식적인 한 마디였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이다.”


영화개봉 이듬해인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에도 ‘국민’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 등장한 국민과 박 대통령의 국민이 전혀 다르게 와 닿는 건 왜일까? 아마도 국민을 바라보고, 마주하는 온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체온을 가진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변호인>은 돈 잘 버는 세법 전문 변호사가 학생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밤새워 자료를 읽고, 잘못된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통이란 이렇듯, 자신의 지식이나 관점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과 처지에 동참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소통’이 최대 관심사이자 화두로 떠오른 2014년 대한민국.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끊임없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통의 의미가 단순한 기계적 만남이라든지 또는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을, 주장이라도 적당히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중략) 비정상적 관행에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소통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취임 후 거의 일 년 만에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강조한 것은 원리‧원칙을 앞세운 권위적 소통이다. 이것은 ‘소통’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처사다. 


소통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남 사이에 놓인 막[경계]부터 제거해야 한다. 나의 선입견, 오만, 자존심, 원칙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소통의 자리가 마련될 수 없다. 국민과 소통하겠다고 하면서 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기만 하고 국민들 사이로 내려오지 않는 한 소통은 없다. 


희망과 기대로 출발한 2014년 갑오년이었지만 우리나라는 수많은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고 급기야 국정농단사태로 이어지면서 2017년 3월 10일, 소통을 강조했던 대통령 박근혜는 결국 파면되었다. 


최한기의 신기통(神氣通)의 철학 : 진정한 ‘통(通)’은 막힘없이 흐름이다. 


▲ (사진출처=atlassian)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조선의 유학자가 제안했던 소통의 철학을 한 번 들어보자. 당시 조선은 유교적 사상만을 중시하며 세상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민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마저 잃게 될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조선의 안타까운 현실을 새롭게 열어 밝히기 위해 ‘통(通)의 철학’을 주창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혜강 최한기(1803~1877)이다.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두 학파는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이다. 주리론은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와 원리를 이(理)[천리(天理)]로 보고, 거기에서부터 도덕원리를 도출해내어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을 세운다. 최한기는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주리론을 반대하고, 우주 만물의 근본을 기(氣)로 보고 변화와 운동을 강조하는 주기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신기론(神氣論)을 주장한다. 최한기는 천지만물을 형성하는 것은 신기이고, 인간의 심기(心氣)는 신기가 통하는 것을 알고, 그 신기가 서로 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최한기의 신기론(神氣論)은 신기통론(神氣通論)으로 전개된다. 


최한기의 신기통 철학은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 첫째, 신기는 천지의 기이다. 우주는 신기로 가득 차 있는 장(場)이다. 둘째, 신기는 형체의 기이다. 우주 안의 만물[사물과 사람]은 신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천지만물은 신기 그물망의 그물코이다. 셋째, 우주와 천지만물은 신기에 의해 두루두루 서로서로 통(通)하고 있다. 


우주 전체는 하나의 장으로서 통의 전체성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근본원리로서의 신기통(神氣通)이다. 개개의 천지만물은 신기를 담고 있는 형태와 성질로 신기의 통로 역할을 한다. 곧 몸체로서 통의 구실을 하는데, 이것을 형질통(形質通)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얼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미룸과 헤아리는 추측통(推測通), 형편에 마땅하게 대처하는 변통(變通), 사물에 두루 통하는 주통(周通)까지 행사할 수 있다. 신기로 이루어진 우주만물은 신기로 말미암아 서로 소통하면서 통일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핵심은 ‘통(通)’이다. 


“이른바 통이라는 것은 기의 대략을 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요, 통한다는 것은 정력을 다해 철저하게 궁구해서 [기필코] 그것을 통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기통(神氣通)』)


여기서 최한기는 개별적 존재가 단절이 아닌 소통의 형태로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개별적 존재의 소통을 인간 존재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대저 하늘과 사람의 신기는 이미 생명을 받은 처음부터 서로 소통하고 서로 연접하여 시종 서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 존재자들 간의 소통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과 관점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최한기에 따르면, 통한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며, 끊임없이 막힌 것을 뚫어가는 행위이다. 두루두루 통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다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대개 통하게 하는 것은 기의 힘이고, 통하고자 하는 대상은 가로막고 있는 사물이다.”


인간과 사물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통로는 인간의 감각기관과 추측(推測)[미루고 헤아림]이다. 인간의 신기를 침해하고 어지럽혀 가려 막는 것은 모두 통의 원수(怨讐)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사태 등 천지의 기가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막는 사물은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원리·원칙으로서의 법이나 규율, 규칙과 질서가 또 다른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장벽이 되거나, 조화를 깨트리는 무기가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통(不通)을 낳게 된다. 진정한 통(通)은 높은 장벽과 단단한 원칙 안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태, 사람과 사물 사이를 막힘없이 흐르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불통(不通)은 왜 일어날까?


“하늘이 사물을 냄에 제각기 형질을 갖추게 하였다. 빛은 눈에 통하고 소리는 귀에 통하고 맛과 냄새는 입과 코에 통하니, 이것이 형질통이다. 이 형질통을 따라 추측통이 생긴다.”


여기서 형질통이란 감각 자체를 말하고, 추측통이란 감각을 통한 인식을 뜻한다. 인간이 대상적 사물과 소통하여 얻게 되는 인식은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최한기는 형질통을 근거로 추측통을 통달하기 위해서는 나의 주관을 가볍게 하고 대상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대상과의 소통에서 객관성, 과학성, 경험성을 중요시하고 주관성, 맹목성, 무경험을 비판하였다. 최한기가 말하는 통과 불통의 차이를 직접 들어보자. 


“통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서 통하는 것이 통이며, 통할 수 없는 것을 알아서 통하지 않는 것도 통이다. 통할만한 것임을 몰라서 통하지 않은 것이 불통(不通)이 아니고 통할 수 없는 것임을 모르고 통하려고 하는 것이 불통이다. 통해 보아서 피차가 서로 합하고 서로 응하여 꼭 들어맞는 것이 실통(實通)이며, 통했으나 불안하고 석연하지 않은 것은 착오통(錯誤通)이다.”


인간이 대상을 그 본질과 현상에 대해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 완전한 통으로서 실통(實通)이 된다. 최한기는 실통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원인을 ‘불통(不通)’을 포함하여 4가지로 유형별로 분류하여 ‘난통(難通)’이라고 명명하였다. 질병으로 가려졌거나 기질이 흐려서 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형질에 의해 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신기는 변통하여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곡(邪曲 - 요사스럽고 교활함)과 허망(虛妄 - 거짓되고 망령됨)을 통한 사람은 오히려 통하기가 어렵다. 허망이나 사곡을 통한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의 도구로 쓰지 아니하고, 현상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을 무시한다. 최한기는 결국 이런 사람들은 다만 신기의 허망한 그림자와 환상을 문제 삼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통하지 않아야 할 것을 통한 것이니 ‘불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에 ‘통’하며 살자!


최한기가 당시 격변하는 현실 속에서 느낀 것은, 천지 만물의 자연 운행이나 사회 문물, 제도, 인간 행위 등은 그 어느 것도 고착되지 않고 변화한다는 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사회의 문물제도와 인간의 행위(가치 기준과 행동 양식) 등은 19세기 들어 급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변통(變通), 즉 ‘변화에 통달하는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는 변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때와 형편이 같지 아니함을 살피고 다음으로 사물의 마땅한 바를 살펴서 조치하되, 옛사람들과 같거나 다른 것에 구애되지 말고 오로지 현재의 사람들의 형편, 사태의 정황에 적합하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변통이다.”


최한기는 천기의 유행과 토질(土質)의 특이함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변동할 수 없음을 보고 “변통의 도는 천지의 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사의 주선(周旋)에 있다”고 하였다. 인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 달려 있다. 최한기는 인간의 주체적인 결정력을 높이 평가하여 현실을 변화시켜 통하게[변통(變通)]하는 데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 


“선악(善惡)·이해(利害)가 어찌 하늘이 정한 한계가 있어서 변통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선이 악으로 변하기도 하며, 이(利)가 해(害)로 변하기도 하고, 해가 이(理)로 변하기도 하는데, 모든 것은 오직 사람의 변통에 달려 있다.”


최한기는 신기와 통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존재가 개별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지고 관련되어 있음을 밝혔다. 진정한 변통이란 인사의 막힌 것을 변화시켜 천지의 변통할 수 없는 신기를 통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도 이러한 연속성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진정한 주체의 실현이다. 우리는 천하를 일체로 삼아 나의 몸에 있는 신기가 하늘에 있는 신기에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2020년 한국인들 대부분은 안녕하지 못하다. 산업화의 산물인 미세먼지는 국민들의 숨통을 조이며 맑은 공기가 통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실업과 도산, 이혼과 파산은 가정의 생기를 빼앗아 개개인으로 하여금 우울증에 허덕이게 하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반목, 정치권의 불통은 생활세계를 동토(凍土)의 땅으로 만들어 국민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서로 간에 잘 통하지 못해서 벌어지고 있다.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자신만의 원리·원칙을 내세워 인간의 고유한 변통 능력을 불통의 무기로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권위를 앞세운 소통은 실통이 아니라 착오통이다. 현실의 기는 늘 유동하고 변한다. 그러니 변통을 위해서 과거에 마련되었던 잣대는 끊임없이 새롭게 개선되고 변혁되어야 한다. 따라서 변통을 위해 미리 설정된 규범이나 사회적 관행을 강요하는 것은 적합한 해결책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통의 능력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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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로벌 인문학 _ 변통의 인문학.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에 통달하라>, 『경향잡지』 2014년 3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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