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매캐릭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미국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 교회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빼곡하고 촘촘한 사실관계에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와 증언이 담긴 매캐릭 보고서는 억눌린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제도교회가 가해자를 옹호했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매캐릭 주변의 성직자들은 한결같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오히려 ‘좋은 성직자를 폄훼하려는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번 보고서를 통해 매캐릭이 한 사제와 수차례 성관계를 맺었고, 여러 차례 아동성범죄를 저질렀으며 신학생들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피해자들의 끔찍한 증언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났다.
‘모금하는’ 매캐릭, 열렬히 옹호한 미국 가톨릭교회
미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미 ‘야심가’로 통하고 있던 매캐릭은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매캐릭에 대한 성범죄 고발은 동료 성직자들의 ‘검증된 선함’에 의해 가려지고, 피해자들은 악의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매캐릭은 주교서품을 받기 전, 뉴욕 대교구장이었던 테렌스 쿡(Terence Cooke) 추기경의 비서 시절부터 ‘모금활동’(fundraising)에 탁월한 소질을 보이며 미국 가톨릭교회 내에서 “훌륭한 활동가이자 행정가”로 평가받아왔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세 차례 주교 후보자로 거론되는 과정에서도 주교들을 비롯한 동료성직자들은 매캐릭의 도덕적 행실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것이 없고” 오히려 “덕과 탄탄한 영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매캐릭 보고서 전체에는 매캐릭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료 성직자들의 증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교황청이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 뉴욕 대교구장 비서 시절부터 매캐릭은 아동성범죄 성향을 보였다. 교황청 인터뷰에 응한 한 부모는 매캐릭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테드 삼촌”이라 부르라고 강요하고, 사제관으로 아동들을 불러 1박 2일 캠핑을 한다거나, 아동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는 등의 “부적절한” 행위들을 해왔다. (VI장 참조)
그가 1981년 뉴저지 주 메투첸 교구장에 임명될 때에도 동료 성직자와 주교들은 그를 추앙하며 그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교성은 “교계제도 내에서 승진하고자 하는 명확한 열망”을 지적했다. 매캐릭이 고위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의 평판에 민감하게 신경 썼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내 사람 챙기기’는 매캐릭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유지해온 “로마 쿠리아와 교황대사관 관계자들에 대한 선물 증정 관행”(Customary gift-giving to Roman Curia and Nunciature officials)에서도 돋보인다. 특히 메투첸 교구장 시절 매캐릭의 비서신부, 메투첸 후임 교구장, 매캐릭에게 서품을 받은 주교들은 매캐릭의 성범죄 가해 사실을 목격하거나 알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묵인하여 은폐했다.
1985년,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별장에 초대받았다가 매캐릭이 잠자리에서 자신의 신체를 만지고 온몸을 감싸는 등의 성추행을 당한 신학생은 그 자리에서 용감하게 “이런 것은 싫다. 여기서 잘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해 신학생은 매캐릭의 행동을 당시 메투첸 교구 성소국장 앤소니 감비노(Anthony Joseph Gambino) 사제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감비노는 해당 신학생이 근거 없는 고발을 하고 있다며 그에게 정신 상담을 받으라고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서품 받지 못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에 해당 신학생은 감비노 신부가 주선한 정신 상담을 받기 위해 에드워드 조그비(Edward Jogby, S.J.) 신부와 만났는데, 불행히도 이 자리에서 조그비 신부는 이 신학생을 상대로 입을 맞추고 성기를 만지는 성추행을 저질렀다.
이후 해당 신학생은 사제서품을 받고 교구청에서 여러 직분을 수행했다. 그는 교황청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당시 상담 때 받은 메시지는 명확했다. ‘네가 주교를 고발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었다”며 “대놓고 협박한 것이라기 보다는 ‘넌 무력한 사람이다. 아무도 널 믿어주지 않을거야’라는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매캐릭의 후임 교구장으로 부임한 에드워드 휴스(Edward T. Hughes) 주교도 마찬가지였다. 매캐릭과 조그비 신부에게서 성추행을 당하고, 성소국장에게 외면당한 신학생은 1989년 이러한 사실을 휴스 신임 교구장에게 털어놓았는데, 신학생은 당시 휴스 주교가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 사람 같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휴스 주교는 매캐릭에 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90년대 아동 두 명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사제가 이 사실을 휴스 주교에게 고백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자신도 매캐릭에게 두 차례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이때도 휴스 주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이러한 피해사실을 적시한 서한을 보냈음에도 메투첸 교구에는 이 서한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은 “기록은 휴스 주교가 해당 사제의 편지를 알고 있었고, 당시에 다른 출처로부터 서한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매캐릭에게 주교서품을 받은 뉴아크 보좌주교 존 모티머 스미스(John Mortimer Smith) 주교, 캠든 새 교구장 제임스 토마스 맥휴(James Thomas McHugh) 주교는 이들의 주교서품 2주년 축하자리에서 매캐릭이 젊은 사제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 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캠든 교구 성소국장을 지내던 도미닉 보티노(Dominic Bottino) 몬시뇰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세 주교는 2000년 5월 매캐릭의 혐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의 질의에 매캐릭의 성범죄를 듣거나 목격한 사실이 없다고 위증했다. 특히, 매캐릭의 혐의에 근거가 없다고 밝히는 서한에서 이들은 매캐릭에 대한 ‘추앙’을 멈추지 않는다. 스미스 주교는 “매캐릭 대주교를 깊이 기도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서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본다”고 말했다.
‘식구 감싸기’에 혈안··· 서슴없는 문서 파기·사실 은폐
1970년 뉴욕 대교구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한 가정의 자녀들이 매캐릭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매캐릭이 자녀들의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을 목격한 이후, 자녀들의 어머니는 1980년대 당시 시카고 대교구장이었던 조지프 버나딘(Joseph Bernardine) 추기경을 비롯한 미국의 추기경들과 당시 주미 교황대사였던 피오 라기(Pio Laghi) 대주교에게 익명 서한을 보내 매캐릭의 아동성범죄 성향을 고발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교황청, 교황대사관, 뉴욕 대교구 기록 어느 곳에도 편지 원본이나 복사본을 찾을 수 없었다”면서 “1990년대 수령한 익명 편지들과 달리 1980년대 익명 편지에 대해서는 보고서가 확인한 어느 문서에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교구와 대사관에서 이러한 문서를 모두 파기한 것이 확인된 셈이다.
이후 매캐릭이 뉴아크 대교구장으로 있던 1990년대에도 매캐릭이 신학생과 침대를 같이 쓰고, 미성년자들과 동침한다며 그의 성범죄자 성향을 고발한 6통의 익명 편지가 도달한 바 있다. 매캐릭은 당시 교황대사 아고스티노 카치아빌란(Agonstino Cacciavillan) 추기경에게 서한을 보내 이 같은 익명 서한이 “아주 불쾌하다”며 “FBI와 지역경찰과 함께 편지를 공유했다”고 말하며 자기 인맥을 과시하며 고발을 부정했다.
카치아빌란 추기경은 매캐릭 보고서 인터뷰에서 이러한 편지가 “익명인데다가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파기했다고 밝혔다. 그는 매캐릭이 뉴욕 대교구장 물망에 올랐을 당시 교황청 국무원 측에서 매캐릭에 관한 소문에 입장을 밝힐 것을 요청하자 “매캐릭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피해자가 없었다”며 매캐릭에 관한 사건들이 “수차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동떨어진 사건들”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러한 고발에 추가적인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게다가 (이로 인해) 심각한 일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매캐릭 몬시뇰에게 ‘시련과 같은 상황’이 생겨날 것”이라며 오히려 가해자 매캐릭의 안위를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매캐릭 역시 2000년 12월 워싱턴 교구장으로 부임한 직후 뉴아크 대교구 행정직원 한 명에게 교구 문서고에서 일부 행정 기록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삭제된 기록에는 매캐릭이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카치아빌란 추기경과 자신을 고발한 익명 서한에 관해 주고받은 서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로 뉴아크 대교구 문서고에서는 관련 자료들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교황청은 지적했다.
교황청은 “매캐릭 대주교가 교계에서부터 도덕적으로 적합하다는 기존 평가와 더불어 특정된 고발인이나 도덕적 행실에 대한 공개적인 우려가 없었으며, 당시에는 익명 고발이 신뢰 받지 못할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이를 부적절한 정치적, 개인적 동기에 따라 이루어진 중상모략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익명 서한은 매캐릭의 행실에 대한 어떤 조사로도 이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근거 없다” ··· 그러나, 남달랐던 한명의 추기경
이러한 미국 교계의 전반적인 옹호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고발을 중립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이러한 논란을 교황청에 그대로 전달했던 추기경도 있었다. 그는 바로 매캐릭 혐의 조사 과정에서 안타깝게 지병으로 사망한 존 오코너(John O'Connor) 추기경이었다.
오코너 추기경은 1990년대 뉴욕 대교구장을 지내면서 매캐릭을 고발하는 익명 서한을 처음 받았을 때는 매캐릭을 별 달리 의심하지 않았다. 세 번째 익명 서한을 받게 되었을 때 매캐릭에게 이를 전달하며 “이것 때문에 미치겠다. 보내기는 싫지만 내가 당신이었어도 이렇게 해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코너 추기경은 익명 서한이 중단된 1993년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미국 순방 준비과정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매캐릭이 있는 뉴아크 대교구를 방문하는 계획과 관련하여 교황이 방문하더라도 매캐릭 관련 문제가 붉어지지 않을지 “확인”(verification)해달라는 교황대사의 요청을 받았다. 이는 매캐릭에 관한 최초의 공식 조사였으나, 별 다른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코너 추기경은 매캐릭에 관한 익명 서한을 1990년대에 받은 고위성직자 중 한 명으로, 실체적 진실과는 관계없이 그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직자였다. 그는 논란이 있었을 당시에 매캐릭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신학생들을 해변 별장에 데리고 간다는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도 이야기하고 있다”며 “그런 짓은 당장 그만 둬라”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직접 들은바 있는 사제가 이를 증언했다.
1997년 시카교 교구장 버나딘 추기경의 후임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매캐릭이 후보로 올랐을 당시에 주교성에서는 매캐릭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외교적이고 자기 성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함과 동시에 “그에 관한 불안한 목소리도 있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캐릭이 지금 다시 세간에 노출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평가하여 시카고 교구장 발령이 취소되었다. 이 자리에 신앙교리성 장관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등이 참석했으나 교황청은 “1997년 이들이 매캐릭에 관한 고발이나 소문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덧붙였다.
매캐릭은 1999년 중반부터 오코너 추기경의 후임 교구장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오코너 추기경은 이를 “교황께서 매캐릭에게 더 높은 지위를 주고 싶다고 확실히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고 평가했다. 오코너 추기경은 당시 교황대사였던 가브리엘 몬탈보(Gabriel Montalvo) 대주교에게 매캐릭에 관한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고 알렸고, 주교성에 이를 전하기 위해 몬탈보 대주교는 문서로 작성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매캐릭의 많은 혐의를 교황청이 구체적으로 알게 된 일명 ‘오코너 서한’이다.
오코너 추기경은 매캐릭을 둘러싼 신학생 별장 사건, 아동성범죄 등의 여러 소문과 고발을 정리했다. 모순적이게도 당시 이 서한 작성에는 신학생들의 호소에는 눈을 감았던 매캐릭의 후배 성직자인 제임스 맥휴 주교와 에드워드 휴스 주교가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교황청은 판단했다.
이후 2000년대 매캐릭을 워싱턴 교구장으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이 주교들로부터 올라왔을 때, 국무원 국무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Giovanni Battista Re) 대주교는 매캐릭에 관한 소문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매캐릭에 대한 고발이 다시 나올 수 있는 만큼 더 큰 교구로 승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않아보인다”고 평가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여 워싱턴 교구장으로 승진이 이뤄지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매캐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비서 신부였던 스타니스와프 지비시(Stanislaw Dziwisz) 주교에게 오코너 추기경의 서한에 반박하는 서한을 직접 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문제는 오코너 서한이 교황대사에게만 전달된 비밀 문건이라는데 있다.
교황청 역시 “매캐릭이 어떻게 오코너 추기경이 그에 관한 서한을 보냈는지를 알아챘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매캐릭은 교황청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교황청 친구들이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편지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편지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결정을 뒤집어 매캐릭을 워싱턴 교구장으로 임명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코너 추기경이 보낸 서한과 더불어 전 현직 주미 교황대사의 보고를 취합하여 국무원 국무장관이 “루머에 근거가 없기는 하지만 고발이 또다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다른 곳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는 의견을 냈음에도, 이후 매캐릭이 개인적으로 지비시 주교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와 자신이 폴란드 공산정권에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매캐릭에 대한 고발을 ‘공작’으로 치부하는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확실하지 않다”, “근거가 없다”, “실체가 없다”, “구체적이지 않다”, “공개적으로 고발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교황청과 미국 주교들은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매캐릭에 관한 고발을 일체 조사하지 않았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 임기에 이르러서야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셈이다.
우리가 이번 매캐릭 보고서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가해자 추기경이 고위성직자들에게 접근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해명과 설득을 하는 동안, 피해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교황에게 전혀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