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뉴노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입니다. - 편집자 주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서문 중)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한 혼란이 좀처럼 종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감염병이라는 게 무섭다. 질병 자체도 그렇지만, 그보다 사람들끼리의 접촉을 꺼리게 된다는 것이 더 주요하지 않을까. 더 이상 이웃들과 살갑게 몸을 부대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손을 붙잡아 흔들거나, 격렬하게 서로의 가슴을 끌어안거나, 볼을 비비거나, 입술을 마주치거나 등등 인류의 인사법에는 신체접촉이 수반되곤 했다. 그런 인사를 멈추게 되었다.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육아를 하면서 가슴 깊이 새긴 속담 하나가 있다. “아이의 뇌는 피부에 있다”가 그것이다. 더불어서 ‘커들링(cuddling)’이란 말도 흥미롭게 접한 바 있다. 『원초적 상처』와 『아이의 모든 것은 몸에서 시작된다』는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말이다. 쓰다듬고 안아주는 일, 포옹이 잦을수록 아이가 더 빨리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위생수준이나 음식의 질 혹은 시설물이 다른 고아원들에 비해 현저히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보듬고 껴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금세 악화된다고. 피부접촉이 면역력을 키워줄 수 있고, 더 나아가 커들링이 그 사회의 폭력 수준을 낮춰줄 수 있다고.
무더운 날, 2살배기 아이에게 억지로 마스크를 씌워야 했다. 아기는 자꾸 벗어젖히려하고, 나와 아내는 한사코 다시 씌우려 했다. 혹시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코로나19바이러스 확진자를 스치진 않을까, 사람들과 간격을 두며 수시로 아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산책했다. 놀이터의 광경은 또 어떠한가. 아이들 모두가 마스크를 썼고, 낯선 이가 혹여 자기 아이와 접촉하지는 않을까 양육자들의 신경은 곤두서있다. 마스크에 얼굴 절반이상이 가려져 있지만 그들의 표정과 심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나부터 그러하니까.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는데, 이는 혈육을 넘어 이웃들과의 유대와 연대,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도와준다. 애석하게도 전염병은 그런 관계의 망을 단절시킨다. 치명적이다. ‘물리적’이 아니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표현에 함의된 것도 그런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타인의 돌봄이 필요할 때가 있다. 특히, 중증장애인, 노인, 아동 등 취약계층에게는 더욱 그러한데, 그들에게 격리는 죽음과 똑같은 의미일 터. 가족의 양육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에, 사회적 보살핌(social parenting)이 제때, 적절하게 이뤄지는 것이 내포되었기를 바란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인수공통감염병의 일종이라고 한다. 주지하듯, 인수공통감염병은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와 생기는 병이다. 변종된 코로나19바이러스까지 종식시킨다 할지라도, 또 다른 이름의 감염병이 발생할 확률은 적지 않다. 야생동물이든 가축이든, 인간은 동물과 접촉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까닭이다. 아마 오늘날 인수공통감염병의 근원적인 이유는, 육류 소비자를 위한 공장식 사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월 25일 작고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수없이 경고했었다. 자연만물과 약자들을 도구화하고 착취하며, 동시에 자신의 존립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자멸적인 체제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또한 그것이 문명사회이며 정상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파국의 도래를 선언하는 예언자의 음성을 경청한 이는 몇이나 되었을까.
교회는 피조세계의 청지기를 자처해왔으나, 실상 기후붕괴를 초래한 주범에 다름 아니었다. 땅의 핏소리, 돌멩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깡그리 무시해왔다. 박해받던 시절, 기독교 가정에게는 필수품 3가지가 있었다. 한밤 중 은밀히 찾아온 나그네를 맞아들이기 위한 초, 당장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마른 빵, 그리고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담요. 이토록 교회공동체는 살가웠고, 환대라는 전통은 생생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앙심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투적인 답변이다. 나의 생존과 너의 생존이, 나의 안녕과 너의 안녕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잊지 말자, 우리의 생명과 평화가 이어져 있음을.
김민호 (지음교회 담임목사, 문화다양성교육연구회 다가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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