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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뉴노멀은 지구의 새로운 균형감각을 좇아갈 수 있을까? - [사건과 신학] 성장주의 없이 지구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용기
  • 신익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2-03 12:32:47
  • 수정 2020-12-10 10: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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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뉴노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입니다. - 편집자 주



2004년도에 경제 분야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new normal’이라는 용어가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사회 문화적 변곡점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뉴노멀, 보통 ‘새로운 표준’이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이전과 이후 사이의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전제하는 말이다. 지금 이러한 변화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인류 문명들의 전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 ‘전 세계’적으로. 그런데, ‘전 세계’라는 이 말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소린가! 인류는 너무도 쉽게 이 세계 전체를 자신들과 동일시해 버린다.


인류의 공간적 영역은 지구라는 행성의 부분이며, 이 행성은 태양계의 부분이고, 이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부분이며, 이 은하는 우리 우주의 부분이다. 인류의 시간적 영역 또한 보잘것없는데, 거의 137억 년에 달하는 우주의 나이에 비할 때, 인류의 역사는 고작해야 수만 년으로 우주의 나이에 비할 깜냥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자신들의 시공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유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즐긴다. 게다가, 그 인류라는 것조차도 각종 복잡한 이유가 덕지덕지 붙은 차별과 불평등으로 여러 갈래 나뉜 결과, 역사상 단 한 번도 ‘인간’이라는 이름 안에 ‘모든’ 인간이 다 포함되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인류가 자신들의 작은 그릇들, 그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릇들 안에 온 우주를 담아내려고 버둥거리는 동안, 그 우주 중에서도 인류가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지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번개가 꿈틀거리고, 바람이 꿈틀거리고, 기온이 꿈틀거리고, 땅이 꿈틀거리고, 바다가 꿈틀거리고, 얼음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이 꿈틀거림들 사이로 코로나19가 고개를 내밀었다.


코로나19 류의 지구적 꿈틀거림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최근 50년간 유행했던 전염병들 대부분은 코로나19와 같은 동물 유래 전염병이다. 통계에 의하면, 이 기간에 유행했던 전염병 네 개 중 셋은 동물에게서 유래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인류가 자신의 가장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릇들 안에 지구를 욱여넣으려고 한 결과다. 인류는 지구라는 한정된 동네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몇 종의 가축들을 빼고는 거의 모든 야생동물이 살던 고향을 빼앗고 내몰았다. 


하지만, 지구 위 공간은 한정적이다. 고향에서 내쫓긴 동물들은 멸종되거나 멸종되고 있고, 공간의 한정성으로 인해 인간과 남아 있는 야생동물들 간의 접촉 기회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이 생태환경을 상대로 땅따먹기를 벌인 결과, 인간과 야생동물들 간의 접촉 기회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야생동물들과의 접촉 기회 증가는 인간에게는 낯선 바이러스 손님들을 맞이할 기회의 증가도 동반했다.


물론, 이 모든 꿈틀거림은 인류가 자신들의 문명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벌인 모든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지구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꿈틀거림에 대응하여 나름의 조화와 균형을 찾아간다. 그런데, 지구의 입장에서는 단지 그뿐이다.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들, 탄소와 메탄을 이전보다 엄청난 양으로 뿜어낸다든지, 야생동물의 서식지 고향을 욕심을 채우기 위해 빼앗는다든지 할 때, 지구가 하는 일은 그저 자신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맞춰 새로운 균형과 조화 상태를 찾아갈 뿐이다.


인류의 난개발과 과소비로 지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다고? 지구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저 지구는 새로운 변화에 맞춰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온실기체가 이전보다 더 많아져서 저장되는 에너지가 늘어나면, 지구의 여러 권역은 그에 맞추어 꿈틀대다가 새로운 지구로 변신한다. 인간이 야생동물들을 무시하고 지구상에서 내쫓으면, 지구 생태계는 그에 맞추어 꿈틀거리다가 새로운 생태계로 변신한다. 지난 46억 년 동안, 지구는 늘 그래왔다. 지구온난화나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이 이전과 좀 다른 게 있다면, 이러한 지구의 변화를 인류 자신이 자극하는 중이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러니 묻자. 인류가 지금처럼 인류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전 세계’로 전제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일상을 고민한다면, 인류의 이 뉴노멀은 과연 지구의 자연스러운 균형감각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인류의 자멸 앞에서, 지구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갈 뿐인데도 말이다.


성장과 번영이라는 말로 포장된 ‘텅 비고 굶주린 욕망’이 없어도 인류는 기존의 생태계 내에서 지구의 균형감각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 지구의 이 균형감각이 지구상 최고로 우월한 종이라고 우쭐하며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세계를 전 세계라고 부르는 왜곡된 자존감의 인류를 본의 아니게 시험하고 있다. 성장주의 없이 지구와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용기, ‘탈성장’의 문명을 시작할 수 있겠는지를 말이다.


신익상(성공회대학교, 한국교회환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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