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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이 함께 어울려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
  • 이기상
  • 등록 2020-12-28 11:02:32
  • 수정 2020-12-28 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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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부터 매주 월요일 연재되었던 [글로벌생명학]과 [글로벌인문학]은 이번 편을 끝으로 마감합니다. 6개월 동안 귀한 글을 나누고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기상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과 새로운 주제로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편집자 주


우려되는 패륜범죄의 확산


2014년 10월 창원시에서 15살 아들이 집에서 둔기로 아버지 얼굴을 내리치고 각목으로 수차례 때린 혐의로 구속됐다. 2016년 1월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40대 가장이 아들과 딸, 아내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지면서 존속을 살해하는 패륜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1~2017년 친족 대상 범죄는 매년 증가해 21만 1851건이다. 가족 범죄 중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폭력이며, 강간, 방화, 살인 등 강력범죄 비율도 높았다. 


친족 가운데서도 함께 사는 ‘동거친족’을 대상으로 한 범죄 비중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패륜범죄의 경우 가족의 해체에서 중요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 등으로 긴밀한 유대관계가 끊어졌거나, 가정 내 교육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가족 간의 끈끈한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孝)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 ‘효 정신’을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로 부각시키며, 그런 콘텐츠를 개발해 전 세계에 알리자는 운동이 전개된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다. ‘우리’를 감싸주던 사랑과 신뢰의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서로를 보듬어주던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때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아니다 



지구의 역사 46억년에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혁신적인 진화가 큰 역할을 하였다. 생물학적으로 큰 두뇌를 갖게 된 것과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예측하고 대처하는 탁월한 능력이 그것이다. 요컨대 큰 두뇌와 가족제도가 오늘날의 인간을 이루는 큰 축이다. 물론 이 둘은 같이 간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고 새로운 공동양육 방식으로 가족 구조를 발전시키면서 두뇌가 발달하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서로 협동하고 소통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노동하여 획득하였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인간’에 속한 본질적인 차원으로 사회, 노동,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세 차원은 따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세 차원의 뒤엉킴 속에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의 공간을 만들고 앎의 지평을 넓혀온 것이 인류발전의 역사다. 


한마디로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아니다.(Ein Mensch ist kein Mensch.) 인간은 항상 언제나 그 세 차원이 펼쳐주고 있는 마당인 생활세계 안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래서 생활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사회적 행위이면서 동시에 노동의 행위인 것이고, 그것들은 또한 항상 언어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언제나 말로 소통하면서 남들과 더불어 생존을 위해 함께 노동하며 삶을 꾸려나간다. 그리고 그 맨 밑바닥에 가족이 있다. 인간의 아기들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모두 미숙아의 상태로 태어난다. 인간은 두뇌가 커야 제대로 된 인간구실을 하기 때문에 다른 포유동물이나 원시 생물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긴 유년기를 보낸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상대로 태어난다. 


‘우리’로 만드는 가족관계


인간의 조상들은 자식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서로 협동하게 되었고, 진화를 거치면서 이 같은 가족제도가 성인으로 자란 인간의 심리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런저런 가족집단의 일원이 된다. 어린 시절을 거치고 두뇌가 커가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생활방식을 흡수하면서 누가 안전한 ‘가족’, 즉 ‘우리’인지 판단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아주 일찍부터 우리와 타인을 기본적으로 구분한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관계 맺는 방식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사냥과 채집생활을 하는 작은 집단에서 시작해서 큰 규모의 농경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다음 왕족이 통치하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잘 짜인 계급제도 속에서 차별화된 신분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유대를 이루며 살았다. 최근에 와서는 크지만 일정한 형태가 없는 집단(유사가족적인 집단, 연예인 팬클럽, 소설 속 캐릭터, 동호회 등)에 속해 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우리’를 ‘타인’과 구분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면서 살아왔다.


▲ ⓒ 가톨릭프레스 자료 사진


인간은 누구나 처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을 시작한다. 가족은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인 동시에 문화적 환경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우리가 언제 무엇을 먹는지, 그것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와 관련된 생활 수단과 방식을 배워 익힌다. 이런 식의 가족 안에서의 어릴 적 경험들이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나중에 성장해서 이렇게 형성된 세계관을 바꾸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초기 형태의 가족 단위를 초월해서 인간관계를 훨씬 더 넓게 펼쳐나간다. 우리는 친구나 학우, 직장 동료, 동호회 회원 등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는 영화나 연속극,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연관지어서도 다양한 형태의 ‘우리’ 집단을 만든다. 


한국말 ‘우리’의 뿌리와 뜻


우리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최봉영 교수는 우리말의 ‘우리’가 ‘울이’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울이’는 ‘울리다’에서, 그리고 ‘울리다’는 ‘울히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울히다’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감싸 안음으로 이루어지는 ‘울히다(:擁)’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의 울림으로 이루어지는 ‘울히다/울이다(:鳴)’이다.(최봉영, 『말과 바탕공부』, 고마누리, 2013.)


한국인의 독특한 언어습관으로 ‘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저’ 또는 ‘우리’라고 일컫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저’는 낱낱으로서 따로 하는 나를 말하고, ‘우리’는 모두로서 함께하는 나를 말한다.(최봉영,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지식산업사, 2012.) 낱낱의 ‘저’가 아닌 ‘우리’는 나와 남이 임자로서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우리가 됨으로써 나와 남을 넘어서 하나의 모두를 이룬다.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네 가지 의미 갈래로 세분될 수 있다. 첫째, 나와 남이 저마다 따로 하는 바탕 위에, 어떤 뜻도 같이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함께하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다(‘우리 고장’, ‘우리 세상’). 둘째, 나와 남이 저마다 따로 하는 바탕 위에, “어떤 뜻을 같이하는 상태로서 함께하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이다(‘우리 사회’, ‘우리나라’). 셋째, 나와 남이 이쪽과 저쪽으로 “함께 어울려서 하나된 모두를 이루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이다(‘우리 남편’, ‘우리 가족’). 넷째, 나와 남이 이쪽과 저쪽으로 함께 어울려서 하나의 모두를 이룬 가운데 “우리의 밖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도 함께하려고 하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이다(‘모든 우리’, ‘우리 모두 다 함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우리’를 앞세우는 한국말의 특성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한국인은 나와 남이 우리를 이루고 있을 때, 내가 남을 나보다 더 살뜰하게 여길 때, 남을 ‘∼님’으로 높여서 부른다. 부모님, 형님, 아우님, 아주버님, 아주머님, 도련님, 선생님, 사장님, 회장님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인은 내가 작은 나인 저의 단계를 넘어서 큰 나인 우리의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나를 사람답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인에게 우리는 사람다움에 대한 꿈을 이루어가는 바탕과도 같다. 이런 까닭에 내가 어떠한 우리를 삶의 목표로 삼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와 어울림


‘우리’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남[들]이 어울려서 함께하는 하나의 모두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어울림이 중요하다. 어울림에서 ‘어’는 이것과 저것으로 이루어진 짝을 말하고, ‘울리다’는 서로 울려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어울림은 이것과 저것이 짝을 이루어 서로 잘 울리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한국인은 서로 울림을 주고받음으로써 어울림 속으로 들어가 하나의 ‘우리(=울이)’를 이룬다. 그런데 한국인이 이루는 ‘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어울리는 일이다. 한국인은 남자와 여자가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서 어울리게 되면 하나의 완전한 ‘우리’, 곧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몸을 이루는 것(一心同體)’으로 여긴다.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가정을 이룸으로써 어른으로서 사람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자녀를 낳고 길러서 더욱 큰 우리를 만들어간다. 이런 까닭에 옛말에는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하나가 되는 것을 ‘어르다’, ‘얼이다’, ‘얼리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한 사람을 어른, 곧 ‘어룬’ ‘얼운’, ‘어론’, ‘얼운 사ㆍㅁ’으로 불렀다.


더 나아가 한국인은 모든 것이 어울려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과 대상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모든 일도 어울림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에게 세상(세계, 우주)을 뜻하는 ‘누리’는 ‘누리는 곳’으로서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누리는 바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어울림 관계의 망에서 보아오던 우리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자리를 서양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메우고 있다. 나를 앞세우지 않고 남들과의 어울림을 중요시했던 태도는 나의 욕망과 편함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대신하고 있다. 뇌의 용량이 커진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과 협동을 거부하고 자기 안에 갇혀 더 큰 나인 ‘우리’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퇴행적 유아의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가족 안에서 어울림의 인간이 되는 ‘우리’ 교육을 해야 할 때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 어울림의 인문학 - 나와 남이 함께 어울려 어른이 되어가는 ‘우리’ >, 『경향잡지』 2014년 12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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