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팔일 축제 제7일(2020.12.31.) : 요한 2,18-21; 요한 1,1-18
오늘은 성탄 팔일 축제 제7일이며 2020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독서에서는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이, 그리고 복음에서는 한처음에 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노동과 경제에 있어서도 거짓된 가치관에 의한 시대를 종식시키면 행복을 창조하는 노동과 사랑을 실천하는 경제의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어린 예수님을 길러주신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목수일을 배우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목수라는 직업은 오늘날처럼 목공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과 가구는 물론 농기구와 생활집기 등 모든 도구들을 만들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는 종합적인 기술자였습니다. 그래서 목수일을 배우면서 나무를 비롯한 자연 재료들에 대해서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도구를 편리하게 만드는 기능과 안목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시 요셉은 이런 재료들의 성질이나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재료들이 나오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섭리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목수일만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다양한 직업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 근거는 이러합니다. 사람의 눈이 얼굴에 달려 있어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거울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듯이,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비유 등을 통해 말씀하신 바를 통해서 미루어보면 얼마든지 어린 시절의 예수님께서 노동과 경제의 현실에 대해 터득하시고 경험하신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동의 고단함과 가장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멍에의 무거움에 대해 알고 계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짐을 없애주겠다기보다는 그 짐을 가볍게 해 주겠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운 비결을 알려주시려는 뜻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비결은 이렇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5.32-34). 그러니까 노동의 고달픔과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비결이란 먼저 하느님을 찾는 것이요, 그분의 의로움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노동함에 있어 먼저 하느님을 찾고 의로움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은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에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노동은, 우리 모두가 받고 있는 탈렌트로 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가 받은 탈렌트는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고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늘렸느냐 하는 것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직업의 종류나 학력 수준이 아니라 노력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또 미나의 비유(루카 19,11-27)에서는, 노력하여 얻은 성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평가하실 것이며 또한 그 평가에 정비례해서 책임과 권한을 조정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연장될 수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시어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시는데, 이는 노동과 경제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중하는 진리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진리에 대해서 ‘노동의 영성’으로 해석해 주었습니다(회칙 「노동하는 인간」제5장). 인간은 누구나 노동하는 존재이며 노동은 사회문제의 관건이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이고, 어려서는 목수일로 장성해서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노동하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노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가 노동을 하며 겪는 수고는 그분의 십자가에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 수고를 감내하게 만들어주는 보람은 그분의 부활과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차원으로 우리 노동의 의미를 한껏 성화시킬 수 있게 되면, 노동으로 지향하는 가치 또한 질서를 지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노동을 하든지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여 세상을 유지하거나 변혁시키거나 발전시키는 노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협력자가 된다는 점과, 그리고 이 노동을 통해 다른 이들과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이 으뜸과 버금가는 가치입니다. 이 중요한 가치들을 앞세우게 되면, 그 노동을 통해서 얻은 수입으로 자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가능해지지만 이것이 더 보람있으려면 그 노동으로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귀한 자녀를 일과 돈의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런 시대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끝내야 합니다. 일은 행복을 창조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며, 돈은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삼을 줄 아는 자녀로 기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