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저녁,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으로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69)를 임명했다. 장관 임명에 따라 대주교 칭호를 받은 유흥식 대주교는 이탈리아 출신 베니아미노 스텔라(Beniamino Stella) 추기경의 후임으로, 오는 8월 1일부터 장관직을 수행한다.
스텔라 추기경이 2016년 추기경 정년인 75세를 넘기고도 성직자성 장관을 연임해왔던 와중에 아시아, 한국 출신의 유흥식 대주교가 전 세계 가톨릭교회 성직자 생활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번 임명에서는 유럽 중심의 가톨릭교회를 ‘탈중앙화’하는 작업과 더불어 아시아 가톨릭교회에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큰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성직자성은 이름 그대로 전 세계 41만 명 규모의 성직자들 생활 및 사목 전반을 보좌하는 교황청 부서다. 성직자성은 특히 미래사제 양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부서이며, 이외에도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중책에 아시아 출신 주교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사제양성 기조에도 큰 변화가 찾아올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는 단서다.
실제로 교황은 사제양성과 관련하여 지난 5월 24일 이탈리아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종종 훌륭해 보이지만 경직된 신학생들이 있는데, 이런 경직성은 올바른 정신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흥식 대주교의 장관 지명 직전인 6월 초, 교황은 성직자성 시찰을 명령하기도 했다.
유흥식 대주교는 한국 출신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장관직과 같은 교황청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이에 더해 유흥식 대주교는 성직자성 장관으로는 2번째 아시아 성직자이며, 교황청 장관으로서는 교황청 역사를 통틀어 4번째 아시아인이 되었다.
성직자 양성이 가톨릭교회 존속의 큰 축이 되고있는 만큼, 대체로 성직자성 장관직은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유럽 또는 서양 출신 성직자들이 수행해왔다.
당장 베니아미노 스텔라 추기경은 이탈리아 출신이며, 교황청 외교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각국 교황대사를 지냈다. 스텔라 추기경의 전임 장관 마우로 피아첸차(Mauro Piacenza) 추기경도 이탈리아 출신으로 성직자성에서 오래 근무하며 경력을 쌓아 차관직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교황청 역사상 아시아인이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된 것은 약 30년 전인 1990년 초 필리핀 출신의 성직자 호세 토마스 산체스(Jose Tomas Sanchez) 추기경뿐이었다. 교황청 전체 부서로 시야를 넓혀 살펴보더라도, 아시아 출신이 교황청 장관직에 오른 것은 2006년 이반 디아스(Ivan Dias) 추기경이 인류복음화성 장관에 임명된 사례뿐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존재의 변방’에서 추기경을 잇달아 선출하면서 추기경들의 출신국이 이전보다 더욱 다양해지는 것은 물론 유럽 이외 국가 출신 성직자들이 교황청 직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유흥식 대주교는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임기 중 교황청 중책을 맡은 두 번째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앞서 2019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 필리핀 출신의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Luis Antonio Tagle) 추기경을 임명했다. 인류복음화성은 사실상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교 지역’ 교회 전반을 관장하는 교황청 부서로 인류복음화성 장관은 우스갯소리로 ‘붉은색 교황’(이탈리아어: papa rosso)라고 불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지위다.
교황청 홍보매체 < Vatican News >도 이 소식을 다루며 “타글레 추기경의 인류복음화성 임명 이후 성직자성 장관에 한국 주교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시아에 대한 교황의 관심을 보여준다”(이탈리아어판), “타글레 추기경 이후 또 한 명의 아시아 교회의 중요 인물이 로마 쿠리아에 합류했다”(프랑스어판)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유흥식 대주교의 인연은 2014년 교황 방한 당시 아시아 청년 대회로 대전을 찾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교황은 유흥식 대주교를 2018년 청년 시노드 때 교황 임명 특별 교부로 임명하기도 했다.
유흥식 대주교는 1969년 서울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1976년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인 1979년 사제품을 받은 유 대주교는 1983년 교의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솔뫼 피정의 집 관장, 대전 가톨릭 교육회관 관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총장을 거쳐 2003년 대전교구 부교구장, 2005년 대전교구장에 임명된 유 대주교는 주교회의 주요 위원회를 두루 거치면서 한반도 평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지난 4월 17일에도 교황청을 방문한 유흥식 대주교는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교황의 방북 의지를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장관 임명 이후 < 연합뉴스 >와 인터뷰를 가진 유흥식 대주교는 이 때 성직자성 장관직을 교황으로부터 제안받았다고 밝혔다.
통상 교황청 장관이 된 성직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것이 관례인만큼 이번 성직자성 장관 임명으로 유흥식 대주교도 다음 추기경 회의 때 추기경으로 서임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한국 천주교에는 정진석 추기경 선종 이후 추기경이 1명(염수정 추기경)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