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후 목요일(2022.1.6.) : 1요한 4,19-5,4; 루카 4,14-22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벼랑 끝에 내몰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릴 뻔 했던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다시 찾고 기운을 내서 살아가고자 일어설 때, 우리는 메시아께서 일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주님의 공현을 세 가지로 알려주었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 요한 세례자로부터 받은 세례, 카나의 혼인잔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공현의 또 다른 징표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선포하신 것이고, 또 실제로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이들이 기적을 체험했으며, 과연 그들이 초대교회 시절에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는 공동체를 이룩했으며, 이 섬김과 나눔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박해 속에서도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비록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또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서로 섬기는지, 서로 나누는지, 더 가난한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는지를 눈여겨봅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을 보면 비로소 하느님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이들의 신앙인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 징표, 즉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이 또 다른 주님 공현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섬기기보다 서로 다투고, 서로 나누기보다 더 가지려 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외면하면 세상은 신성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를 걱정해줍니다. 요즘의 세태가 이렇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형제도 이웃도 특히 가난한 이웃도 사랑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현대 인류의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해도, 또 인간 지성과 양심이 깨어났다고 해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난의 문제입니다.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지성과 우주를 정복할 듯한 기술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숙명적인 과제처럼 안고 있는 것이 빈곤의 굴레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