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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너를 좋게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너는 불행하다”
  • 김웅배
  • 등록 2022-02-08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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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치인이 군중집회에서 반대자들에게 달걀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여유 있게 옷매무새를 고치며 한마디 한다. “아침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봤더니 먹는 것을 조심하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게 달걀일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랬다면 군중들에게 그는 ‘오늘의 운세’를 믿었으니 무속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을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꿈의 해석을 통해 인간 뇌의 무의식 활동을 밝혀냈다. 잘 아는 어느 신부님은 꿈을 꾸면 매번 그 꿈을 필기해 놓는다고 한다. 꿈속에서의 무의식을 알아차리고 의식 속의 삶을 주시한다고 하였다. 필자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개인적 꿈을 자신의 의식세계를 향한 어떤 메시지로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보다 풍부한 삶을 살기 위한 스스로의 알아차림이랄까? 


우리는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살 생각부터 한다. 이것을 미신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멋쩍다. 옛날에 유행했던 토정비결도 마찬가지다. 토정비결을 봤다고 이 미신쟁이야 하기가 좀 그렇지만 제도종교에서는 이것도 사탄의 일로 여긴다. 점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 K-드라마는 참 대단하다. 옛날과 현세가 같이 연결되어 있고 같은 세상을 영위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E.H. 카의 명언을 그대로 실행 중이다. 


염력으로 세상을 주무르고 슈퍼파워를 숨긴 자가 찌질이 노릇하다가 어느 순간에 커밍아웃해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지금은 그 슈퍼히어로가 빌런이 되어 있기도 하다. 무당의 말은 거의 100퍼센트 맞는다. 좀비는 왜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지 가톨릭 신부님은 양쪽 허구의 세계에서 항상 바쁜 종결자로 나타나신다. 가끔 악의 화신으로도 나타나지만 그럴 경우는 사제가 주화입마(走火入魔)된 경우이다. 그런 면에서는 목사님들은 좀 빠지는 편이다. 그 대신에 실제 현실에서는 무속 신앙과 거의 난형난제(難兄難弟)일 만큼 엄청난 파워를 자랑한다.


전 보수 정권의 은밀한 무속적 내면이 천하에 알려져 소속 정당이 초토화된 것이 불과 5년 전이다. 그리스도교의 이단적 요소는 성경 해석이 보다 자유로운 그쪽이 강하다(오해의 소지가 있어 첨언하면 소위 휴거 소동’은 대부분 개신교로부터 연원된 사이비 이단에서 나온다). 이 세태에 만연된 주술의 세계가 사실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매혹적 주제임이 분명하다.


첨단의 시대에는 AI로 통계학적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지만 명확한 미래를 내다 볼 수는 없다. 과거에 세습제에서 부족한 왕일지라도 정도전이 주창한 신권(臣權)정치에 의해 보완이 가능하다지만 왕이 될 가계도, 소지도 없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 수 없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부 쿠데타를 통하거나 4.19혁명처럼 실제적 백성들에 의한 혁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래서 그런지 첨단선진국이라고 선언된 대한민국에서 하다못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가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나오는 황당한 꼴을 보게 되었다.


아무튼 ‘유능한 주술사’는 그 사람의 면면과 됨됨이에 관계없이 왕(王)을 점지하고 주위를 어지럽게 해야 한다. 그 이유가 뭘까? 점지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만의 신령한 세계의 ‘선지자’를 비난하기가 꺼림칙할 것이다. 그들의 음험한 속내를 알면서도 부인은커녕 그들의 예언력을 그대로 믿어야만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보편적 운세 판단을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점지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야 하고 그의 예언을 따라야만 한다. 따르다 못해 이제는 그들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말하는, 독학으로 배워 그들보다 한수 위라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여인도 생겨났다. 정식 허가(?) 받은 무속인들이 데모를 해야 할 판이다.


현세의 개인적 복락을 추구하는 것도 종교의 필요선(必要善)이다. 분명히 예수님도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전제조건이 따라붙는다. ‘하늘의 뜻’을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고 난 다음이다. 오로지 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다. 


무속적 요소는 모든 종교에 내재한다. 현세의 무속 신앙은 원시적 형태로 남아있다. 복락(福樂)의 근본이 선악이나 어떤 지고의 가치관과는 별 상관이 없다. 개인이나 가족 등 소규모의 안녕과 복락이 우선이지 나라의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즉 자기들만의 리그를 위한 ‘신령한’ 굿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속이 정치와 어울리면 그 후과는 지대하고 파괴적이다. 그런 일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한 무속적 행위를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달린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전제조건인 ‘사랑의 이중계명’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현세의 정치적 권력을 지향하거나 재물을 원한다. 복락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면 즉, 마(魔)가 끼는 것을 방지하려면, ‘신들린’ 노력과 ‘귀신도 부리는’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속 신앙에서는 제도종교가 가진 평화, 정의, 공동선의 가치관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데에 결점이 유발된다. 지금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의 퍼포먼스로 바라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바오로 사도는 현세 복락만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렇게 경종을 울린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코린토1서 15,19)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예수님은 행복선언도 하셨지만 가히 주술(呪術)에 가까운 예언적 불행선언도 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 25-26)


무속 신앙은 과거 인류가 간직해온 종교의 시원으로서의 역할을 다 했지만 지금도 그 문화적 가치는 인류가 지구에 존재하는 한 존재할 것이다. 그리나 거기에는 문화적 가치보다 진짜 기복신앙으로 믿고 인생을 걸며 일희일비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먼 옛날 제정일치시대 제사장은 무리의 지도자였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무리의 생사를 갈랐다. 제사장은 신탁을 받아 해석하고 무리를 인도했다. 그들에게는 선악의 개념보다는 무리의 생존이 최우선 순위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사회경제적 덕목 중에도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 생존은 천부(天賦 하늘이 부여하신)의 인권이 보장되어야만 그 진정한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이 원시사회와 다르다.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권세 있는 ‘범법자(犯法者)’가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갈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듯한 ‘법비(法匪)’들의 출몰과 동시에 알량한 ‘법정신’마저 그 주술(呪術)에 맡기는 시대는 이러한 천부적 인권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던 원시사회와 다름이 아니다.


대명천지 선진국으로 등극하고 IT산업의 최첨단임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왕(王)자를 손에 새기면 왕(王)의 재목이 아님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자가 대통령도 아닌 전근대적 왕(王)이 되려고 세상에 나와 매스컴을 타고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를 내세운 정당도 ‘망각(忘却)’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 대단한 정당이려니와 그 사악(邪惡)하고 어리석고 뻔뻔스런 천진함에 허탈을 넘어 ‘헐’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주술적’(?) 말씀을 ‘원문’ 그대로도 좋지만 약간만 패러디해서 되돌려 준다.


‘모든 사람이 너를 좋게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너는 불행하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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