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2022.9.15.) : 히브 5,7-9; 요한 19,25-27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지낸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어머니의 고통을 교회가 기억하는 뜻은,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아드님을 지켜보시는 어머니의 마음도 고통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한 십자가는 생애 마지막 때에만 다가왔던 것이 아니라 공생활 중에 군중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할 때에도 찾아왔고 제자들을 상대로 사도로 양성할 때에도 찾아왔었습니다. 심지어 공생활 이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소년 시절에도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도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서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전승에서는 그 고통이 일곱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모 칠고(七苦)라고 하지요. 성모 칠고란 마리아께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았던 일곱 가지 고통을 말합니다. 즉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심(마태 2,13-15), 시메온이 아기를 축복하면서 비극도 예고함(루카 2,34-35),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을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심(루카 2,41-45), 십자가를 짊어진 아들과의 만남(루카 23,28 참조),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심(루카 23,49), 아들의 시신을 안으심(루카 23,53 참조), 아들을 장사 지냄(루카 23,53 참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는 성모 칠고에 이어 성모 칠락(七樂), 즉 예수님으로 인하여 성모 마리아께서 누리신 기쁨도 일곱 가지로 묵상하며 기념해 왔습니다. 즉, 천사가 구세주 탄생을 예고함(루카 1,26-38),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천사의 전갈을 확인함(루카 1,39-45), 아들 예수가 탄생함(루카 2,1-7), 동방박사들이 아들을 경배하러 옴(마태 2,1-12),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을 찾으심(루카 2,46-47), 예수께서 부활하심(루카 24,1-12), 예수께서 성모를 승천시키심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면서도 전례상의 메시지가 십자가를 부활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룩한 변모 축일을 먼저 지내고 나서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고통도 기쁨과 함께 주어지고 있다는 뜻에서 성모 칠고와 성모 칠락을 함께 묵상하는 일은 필요하고도 좋은 일입니다.
실제로 고통은 기쁨과 함께 짝지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다가 기도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심으로써 그 고통 속에 담겨진 의미를 캐내고야 마셨습니다. 루카는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도하고 있습니다(루카 1,29; 2,1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도 불가피한 고통을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받아들이되, 이와 더불어 십자가의 그리스도하고만 일치하려 하지 말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도 일치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보자면 성모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그분의 눈으로 우리의 사도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고통도 기쁨도 함께 겪으셨습니다. 밤낮없이 찾아오는 군중 때문에 바쁘고 힘드셨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듣는 기쁨을 맛보시기도 했습니다. 눈먼 사람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기도 하는 기적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을 터입니다.
마귀 들려 사람 구실도 하지 못하던 사람이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기적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겁니다. 이런 복음 선포 현장을 목격하면서 군중 가운데 일부라도 하느님께 향한 믿음을 되찾게 되면, 특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그 어떤 일보다도 크게 기뻐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네 사도직 활동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고통을 피해서도 안 되겠지만 기쁨을 놓쳐서도 안 되겠습니다. 고통도 정직하게 직면하되 기쁨도 슬기롭게 챙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미 부활하신 신적 권능으로 다가오는 십자가를 짊어지셨듯이, 우리도 부활의 기쁨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속에서 부활을 보는 눈으로, 고통을 능가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균형 없이 마냥 고통스러운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희망 없이 고통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과 연대하여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희망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연대의 사랑, 사회적 애덕입니다. 이것이 박해시대 우리 신앙선조들이 초창기부터 성모신심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선조들을 본받아 고통과 기쁨의 균형을 맞추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과 부활하신 분은 같은 분이시지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게 한 힘도 부활의 권능을 쥐고 계신 하느님의 영이시듯이, 고통을 정직하게 직면하되 그 고통을 바라보는 눈은 부활의 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