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2022.9.30.) : 욥 9,1-16; 루카 13,47-52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4세기에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예로니모는 일찍부터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하여 사제가 된 후 다마소 교황의 지시에 따라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로마시대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오랜 기간 동안 수행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후에는 성경을 풀이한 주해서를 비롯하여 성경을 신앙의 이치로 체계화시킨 신학 저술까지 남김으로써 암브로시오,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대중화된 언어로 번역되고 더구나 성경의 이야기를 신앙의 이치로 체계화시키면 신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성찬 및 사도직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양식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분이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하면서(요한 1,1-2), 이 말씀이신 분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묵시 21,1).
왜냐하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세상은 죄악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고, 이를 부활의 삶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는데, 이를 십자가라 부르셨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이야말로 새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단지 거룩한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이를 두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히브 1,1-2).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이상, 그분을 믿는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부활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가능합니다. 성찬의 성사는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이 되어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기운을 줍니다.
그래서 성찬의 성사는 말씀을 위한 양식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찬으로 채워진 하느님의 기운으로 우리는 사도직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며, 여기서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 이루는 공동체야말로 모든 사도직의 공통 요소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보내는 마지막 날인 오늘, 한국교회를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을 뒤돌아보자면 말씀의 힘이 압도적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우선 한민족의 초창기부터 초월적인 신, 즉 하느님을 알고 믿어온 정신적 바탕 위에서, 오묘한 섭리로 들어온 교리서를 읽고 그 안에서 신앙 진리를 깨달았던 말씀의 기적이 한국교회를 자생적으로 설립하게 만들었습니다.
무려 백년 동안 이어진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제대로 된 성경책이나 변변한 교리서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하느님 말씀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말씀의 기적으로 이룩된 한국교회 첫 백년인 19세기를 말씀의 교회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촌에서 사회적 신분의 차별은 철폐했어도 교리 지식이 해박한 교우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양반 출신이 아니면서도 학식이 뛰어나서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청도에 복음을 전한 이존창 루도비꼬가 대표적입니다.
그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편지가 이러합니다: “이존창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탄생되었습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저의 모친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나서 일제식민강점기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에 시달리던 또 다른 백년 동안에 방인 사제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신자들도 늘어났으며, 성당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사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된 이 20세기는 성사의 교회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성사 생활을 지금은 마음 놓고 편리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백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21세기는 사도직의 시기입니다. 이제는 말씀과 성사가 겨냥하는 사도직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의 은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모두 다 엄연한 사도직이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모두 사도직 실존을 사는 것입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께서는 이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과도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를 알아차리고, 이 섭리에 따라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