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2022.11.17.) : 묵시 5,1-10; 루카 19,41-44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교우들에게 일일이 권고하고 당부하기를 마친 사도 요한은 이들 모두에게 자신이 파트모스 섬 동굴에서 본 환시를 전해 주면서 공동의 신앙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란 불과 한 세대 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지금은 물론 장차 먼 미래에서도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무려 일곱 번이나 봉인되어 있던 그 두루마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부터 그 내용을 전하도록 분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밝혀진 두루마리의 내용은 첫째,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공적으로 벌이신 활동, 즉 하느님 나라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체험시키고 깨닫게 만든 사랑과 희생의 활약상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루마리의 두 번째 내용은, 비록 그로 말미암아 어린양처럼 살해되시는 운명을 겪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특히 믿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에 속량되어 자유를 되찾은 이들이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시어 부활하신 당신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 하늘의 빛으로 새 땅을 다스리라는 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그 비밀을 밝힌 두루마리는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에게는 임무를 부여하는 하늘의 사령장인 셈이고, 재신임을 부여하는 하느님의 신임장이기도 한 것이지요. 비밀에 싸여 있던 천기(天機)를 계시하는 이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고 천상 어전에서 발표할 때, 스물네 원로가 가지고 있던 금대접에서 향기가 가득 했다고 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소아시아의 일곱 신자들은 물론 이 사명을 계승하는 온 땅의 성도들이 지상에서 현세동안 하느님 나라를 계승할 수 있도록 천상에 계신 성도들이 기도로써 통공을 이루고 성원하리라는 영적 통공의 다짐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먼저 주어졌으나 이들은 이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되려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이 슬프고 답답한 미래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운명 때문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운명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일곱 번이나 봉인된 두루마리는 아무나 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펴기에 합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두루마리의 비밀을 전하는 예언자적인 사명을 수행한 것도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진리만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끝내 멸망당하고 말았으며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세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으로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다 뜯고 나자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환난을 이겨낸 14만 4천 명에 의해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열둘에 열둘을 곱한 숫자에 다시 천을 곱한 숫자로서(12x12x1000=144,000), 열두 지파에서 나온 옛 아나빔들이 새 아니빔인 열두 사도와 함께 시작된 교회가 천 배로 늘어나리라는 뜻인데,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그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며, 이 땅의 교회가 겪고 있는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이를 위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별 지시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문헌에서 밝혀진 두루마리의 메시지의 한 조각은 이러합니다.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은 특히 정의와 연대성과 평화의 표징 안에서 민족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을 진흥시키는 데에 봉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도 구원”하시는 분이므로, “권위주의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류의 위험 속에서 민주주의적 참여 절차가 구조적인 위기를 맞고 그 원리들과 영감을 주는 가치들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대화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건설하는 공통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일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은 하느님 백성의 우선적 임무이며 모든 사회적 행위의 기준”이라는 것이며, “이제 사회의 선택과 계획 수립에서, 가난한 이들이 특전적 위치와 역할을 지니고, 부의 보편적 사용과 연대성의 우선성이 강조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볼 의무가 절박하게 요청되어야 합니다”(「공동합의성」, 교황청 국제신학위회, 2018).
이 같은 전망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생태적 차원에서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어 새 땅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전망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면, 지난 2천 년 동안 꽁꽁 가두어져 온 가톨릭 민주주의의 꿈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가톨릭 신앙인들에 의해서 펼쳐질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