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가 급속한 성장세를 이룬 시기는 1980년대였다. 박정희 유신 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면서 깨어있는 신자들과 사제들은 박정희, 전두환 살인 독재 정권에 맞서는 투쟁에 앞장섰다. 한국교회는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어둠 속의 횃불로서 신앙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함세웅 신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 광주 항쟁으로 투옥과 고초를 당한 광주교구 사제들의 십자가는 민중의 희망이었다. 80년, 90년 당시에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정의를 위한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천주교회는 민중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으며 천주교회에 입문하려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이르러 교세 확장에 있어서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역사신학위원회가 제시한 교회사 분석 자료는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관련 내용을 간략히 검토해보자.
<정의 구현 운동의 전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교회의 역사(천주교) / 제3부 / 3. 한국 교회의 쇄신)
"한국 교회는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면서 이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0년대 후반기 이후 한국 교회는 인간 기본권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교회는 1968년 초에 발생한 강화도 ‘심도 직물’ 노사 분규에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한다. 주교단은 이 공장의 노사 분규에 관여한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되는 가운데,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 교서를 발표하여 노동 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이 사목 교서 발표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다.
1960년대 말 이후 교회의 관심은 경제 개발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산업 사목과 관련된 교회 단체의 활동이 강화되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1966년에는 ‘가톨릭 농민회’가 조직되는가 하면, 1970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기구로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한다.
교회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민주화 문제에 관해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 왔다. 예를 들면 1969년 군사 정권이 독재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3선 개헌을 기도할 때 교회 일각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교회의 정의 구현 운동은 1974년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데, 교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촉발제가 되었다.
정부가 과장 조작해서 발표한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동맹 사건’에 연루하여 그해 7월 1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池學淳, 1921~1993년) 주교가 내란 선동죄로 기소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던 일단의 성직자들이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을 조직하여 불의한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전국의 대부분 교구로 확산되었고, 1970년대 이후 가톨릭 인권 운동과 사회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신자들한테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 이들은 교회의 사회 교리를 천명하면서 정의와 사랑의 개념을 밝히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교회가 전개하는 정의 구현 운동 또는 반독재 투쟁은 당시 사회 양심 세력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원을 받으면서, ‘민주 회복 국민 회의’와 같은 반독재 투쟁의 중심 기관에 윤형중(尹亨重, 1903-1979년) 신부가 상임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교회는 사회 양심 세력과 연합하면서 정의 구현 운동을 전개하고, 그 연합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독재 정치의 종식, 정보 정치의 철폐, 인권 유린에 대한 반대, 부정 부패의 추방, 기본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제단에서는 구속자 석방을 주장하고, 군사 정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정권 아래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각종 ‘시국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혁당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에 동참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시노트 신부가 추방당하였다. 그 뒤 교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76년 서울 명동 대성당에서 이른바 ‘3·1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유신 독재에 대한 가장 선명한 저항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에는 안동교구 농민회를 탄압 하는 ‘오원춘(吳元春) 사건’이 발생하자 교회는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교회의 비판적 태도에 맞서 군사 정권은 교회를 탄압하였다. 군사 정권은 집권 시기에 여러 성직자를 구속 수감하였으며, 교회 신문에 발표하는 사목 교서도 검열하였다. 심지어는 본당 간행물인 「주보」를 정기 간행물 등록법 위반으로 몰아서 폐간하려고까지 하였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발언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을 밝히려고 노력하던 일단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1980년 7월 신군부의 수사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82년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때에는 수습을 원만히 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제가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민중을 사랑하고 민족을 바로 일으켜 세우려는 1980년대의 교회는 초기 순교자들처럼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핍박당하고 고초를 겪었지만 민중과 함께 살아계신 예수를 보여주었다. 또한 독재 정권하의 교회는 안중근 토마스가 항일 투쟁에 나섰던 그 모범을 따라 정의의 편에서 온 몸을 던져 희생하였다.
지금 우리는 타락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권 하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안중근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수난받는 민족과 역사를 살았던 인물, 불의에 저항한 예언자, 순교의 맥을 이어주는 안중근에게 다시 주목해야 한다.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 그러나 분단 상황에 놓인 한반도가 나아갈 길,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장을 열어줄 인물로 다시 안중근을 생각한다.
신성국 :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파견사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