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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한국교회
  • 이기우
  • 등록 2022-12-15 21: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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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목요일(2022.12.15.) : 이사 54,1-10; 루카 7,24-30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제 막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 황폐해진 고국 땅에서 망연자실해 하던 동족에게 희망의 상상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예언을 전해주었습니다. “황폐한 성읍들에 후손들이 좌우로 퍼져 나가서 뭇 나라를 차지하리라.”고, “잠시 하느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크나큰 자비를 다시 얻으리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오래 전의 기억, 즉 노아의 홍수 당시에 하느님께서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고 무지개를 보여주신 기억을 떠올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군중에게 가장 최근의 기억으로서 세례자로 알려진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 이후에 끊어졌던 예언자의 계보를 4백여 년 만에 계승한 마지막 예언자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시며 그가 바로, 당신이 오실 길을 닦아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요한까지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뛰어 넘어서 당신이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즉,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는 크다.”(루카 7,28)는 것입니다. 요한이 준비해 놓은 의로움의 가치에 대한 기억에 바탕하여 이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은 거룩함의 가치를 상상하도록 초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구분하는 개념 중에 차원이 있습니다.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점과 선과 면입니다. 점이 움직이면 선이 되어 1차원 현실을 이룹니다. 또 선이 움직이면 면이 되어서 2차원 현실을 이루고, 다시 면이 움직이면 입체 공간을 이루게 되어 3차원 현실을 이룹니다. 


그런데 입체 공간이 움직이면 4차원이 되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시간의 현실이 이때 펼쳐집니다. 이 4차원에서 과거와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데 과거에 있었던 입체적인 현실을 끌어오는 힘을 기억력이라 하고, 미래에 있을 입체적인 일을 끌어오는 힘을 상상력이라 합니다. 예언자는 기억력을 통해서 과거를 상기시키고 상상력을 통해서는 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메시아께서는 단지 상기시키고 희망을 안겨 주는 예언의 차원을 뛰어 넘어 실제 복음의 실천으로 이 미래 희망의 현실적 근거를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로 하여금 의로움의 가치에 대한 기억력의 힘과 거룩함의 가치에 대한 상상력의 힘을 발휘하게 하셨습니다. 실로 믿는 이들의 교회에서 발휘되는 이 기억력과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을 하느님과 소통하게 해 주는 정신적인 힘입니다.  


당시의 군중은 요한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고 예수의 참 모습도 알아보지 못했었지만, 메시아 신앙을 간직하게 된 아나빔들이 예수 부활을 체험하자 예수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고, 성령 강림으로 교회에 대한 상상이 실제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공동생활과 복음 증거 활동으로 입증했듯이, 기억력이 체계화되면 역사의식이 되고, 상상력이 성숙하면 사명의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편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오묘한 섭리로 신앙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오랜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증거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지난 과거 현실에 대해서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에서 일어난 참으로 기적적인 현상임을 알아보는 역사의식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이제껏 갈라져 있는 민족을 복음화시켜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 미래에 대해서 사명의식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생겨나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 전 소아시아의 초대교회에서만 현실화된 것이 아니었고, 2백 년 전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현실화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오묘한 섭리로 이 땅에 신앙 진리를 자발적으로 들여왔으며, 피어린 백 년 박해 속에서도 그 진리를 증거하고 전해주신 신앙 선조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그 후손들인 우리를 자부심으로 뿌듯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랑스런 기억은 이제 우리의 머릿속에만 간직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상상의 힘, 희망의 원동력으로 되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도입하여 우리가 믿게 된 이 진리로써 우리 민족과 아시아인들에게 전할 하느님 나라의 미래 현실은 과거보다 더, 현재보다는 더욱더 찬란하리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역사의식, 선교적인 사명의식을 갖추면 우리 현실을 단지 입체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훨씬 더 차원 높은 현실을 앞당겨서 민족의 복음화는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 전망까지도 내다볼 수 있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 2014년에 우리 신앙선조 순교자들을 시복하러 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고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절절하게 당부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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