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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불신의 병(病)을 치유하는 믿음의 표징
  • 이기우
  • 등록 2023-03-28 13: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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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2023.3.28.) : 민수 21,4-9; 요한 8,21-30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이르는 40년 도정에서 거쳐야 했던 시나이 광야에서 양식과 물이 부족하여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진노하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에 물려 죽은 이들이 많았으며, 이 죽음이 불평으로 인한 벌임을 깨달은 백성이 하느님께 사죄하며 모세에게 보속을 청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불 뱀과 색깔이 비슷한 빨간 구리로 만든 뱀의 형상을 높이 매달아놓고 이를 쳐다보게 함으로써 불평과 불 뱀으로 인한 소동이 가라앉았습니다. 


구리 뱀을 통한 치유의 효과는 이를 명령하신 하느님을 상기하고 뿌리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믿음을 되찾게 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입니다. 불신으로 인한 병을 낫게 해 주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믿음을 되찾음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면 병이 낫기는 고사하고 그 어떠한 인격적 변화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한낱 미신(迷信)에 불과한 것이지요. 


오늘 미사의 복음 환호송에서는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우리가 인간 생명을 얻었고, 그래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 생명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조상들이 불신에 가득 차서 불평과 불만을 일삼았던 것처럼, 그 후손들도 로마의 식민통치로 민족사 최악의 역경을 겪는 가운데 이 좋지 못한 고질병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오셔서 선민으로서의 희망을 주시고자 가르침과 기적으로 노심초사하셨는데도 그러했습니다. 


하느님보다 마귀의 영향력에 기대던 유다인들은 별 수 없이 아래에서 온 존재가 되었지만, 위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하느님께로 데려가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유다인들이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고서야 죽지 않고 나을 수 있었듯이, 하느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아 불신의 병에 걸린 이들 역시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려지신 예수님을 쳐다보고서야 그 존재와 인식이 온전해 질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비로소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중하는 이치입니다. 


이러한 유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살거나 일하거나 기도하는 모든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어 놓습니다. 쳐다보며 기도하기 위해서이고, 믿음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비롯한 성물(聖物)들을 기도하여 믿음을 상기하고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모상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쓰지 않고 장식품처럼 쳐다보기만 한다면 이는 부적(符籍)처럼 취급하는 셈이 되어 그 어떠한 효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제사를 지내온 우리 한민족 역시 이스라엘 민족처럼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어 왔습니다. 그 제사의 흔적이 고인돌입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7만여 기(基) 이상의 고인돌 중 그 절반이 훨씬 넘는 4만여 기가 한반도와 만주 지방을 비롯한 그 주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고인돌은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권력자의 영생을 보장받으려고 엄청난 공력과 노역을 들인 무덤이 아니라, 천손의식을 지녔던 선조들이 노아를 본받아 돌을 쌓아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제단입니다. 


우리 민족이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 진리를 들여왔을 때, 조선의 조정과 유림들은 나라가 망할 듯이 호들갑을 떨며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특히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처음에 천주교를 들여온 지식인들을 죄다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바람에 지도부가 와해된 천주교는 끝장난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벽의 사후에 그 동료 선비들이 역시 자발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임시성사조직을 4년 동안 가동하면서 한양만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양반들만이 아니라 중인, 상민, 천민, 부녀자들을 고루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늘어난 1만 명의 교인들이 신유박해 이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자생적으로 전국에 교우촌을 세워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그 교우들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 기도로나마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의식이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와서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에 식구들이 모여 드리는 기도와, 주일이 되면 공소에 모여 신자들이 드리는 공소예절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시대 백 년 동안에도 제사를 잊지 않고 바쳤습니다. 이렇듯, 고조선시대 이래의 하느님 제사가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로 인하여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 덕분에 제대로 된 삼위일체 신앙으로 흠숭을 드리는 제사가 바쳐지기에 이르렀는데, 반드시 십자가를 걸어놓은 자리에서 바쳤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바쳤던 이 제사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인하여 그 본질과 핵심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단지 하느님께 복을 청하는 기복적 지향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다짐하는 이타적이고 홍익인간적인 지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쳐다보며 효험을 바라는 부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닮게 해 줌으로써 불신의 병을 치유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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