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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닙니다!”
  • 이기우
  • 등록 2023-04-04 10: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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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수요일(2023.4.5.) : 이사 50,4-9; 마태 26,14-25   


오늘 독서는 고난 받는 종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이사야가 전해준 메시아 예언 가운데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가장 실감나게 내다본 대목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배신할 것임을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공표하신 대목으로서, 메시아가 겪는 수난이 비단 바깥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얼마든지 올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모욕과 수모 같은 외부의 박해도 고통스러운 아픔이지만, 내부의 배신과 무관심도 마음 아프게 하는 고난입니다. 이사야는 수백 년 후에야 나타나실 메시아의 고난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실감나게 묘사해서 전해 주었습니다. 고난을 주는 모습만이 아니라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메시아의 자세를 더욱 실감나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메시아의 자세를 자신을 낮추고 비우시는 자기비허(自己脾虛)의 영성으로 고백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비우는 이러한 자기비허의 영성으로 대하셨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 아마 당신의 말씀을 듣던 군중 가운데 열성과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셨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밤새워 기도하시며 고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고르고 골라서 열두 명만 뽑으셨을 텐데도, 이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눈치채시고도 발설하지 않으시다가 오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발설하신 것인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카리옷 유다는 배신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마태 26,21)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듣자마자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하고 저마다 묻고 있습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배신을 지목해서 시킬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이런 물음이 가능할까요? 


결국 추론해 보자면, 나머지 제자들도 배신자로 지목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양심이 찔릴 거리가 한 가지씩은 다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들을 부르시고 함께 지내시며 참아 받아주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3년 동안이나 사도로 양성 받으면서 종종 엇박자를 내곤 했었습니다.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달음이 굼뜨다고 야단을 맞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 중에서도 세 번에 걸쳐서 그 중요한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시는 자리에서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서열 다툼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몰이해와 무관심, 그리고 얄팍한 믿음은 예수님께 또 다른 십자가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기다려주셨습니다. 심지어 배신할 눈치가 뻔히 보였던 유다에 대해서도 먼저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아끼셨던 제자라는 방증이지요. 그런 그가 기어코 배신의 길을 가려 하자,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하고 놓아 주셨습니다. 그의 배신으로 인해 당신이 당해야 할 고초가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겪으셔야 했던 또 다른 고난이요 짊어지셔야 했던 또 다른 십자가였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부활하신 스승을 만난 제자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하고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지닌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들 상호 간에 빚어지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살아있는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내부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이 크기는 비록 작아 보여도, 느끼는 정도는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외부 시련이 닥쳤을 때 서로가 한마음으로 대처하다가도, 내부의 작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마는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그것도 바로 당신을 믿는다는 교회와 신자들 안에서 겪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분의 신성(神性)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이 성주간에도 세상 일에 몰두하며, 당신의 참 모습을 모르고 또 믿지 않는 이들에게 빛을 전하는 일에 게으르고 둔해 빠진 신자들을 참고 기다려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요한 8,58)고 말씀하심으로써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신 예수님께서 실로 오묘한 섭리로 한민족이 당신을 알도록 섭리하시고, 또 민족사의 초기부터 흠숭해온 하느님 신앙을 일깨워주신 놀라운 역사를 주도하셨으며, 그러기에 반만년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백년 박해 역사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세워가며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그 고귀한 역사, 2천 년이 넘어가는 전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무이한 그 역사를 무심하게도 잊어버려가는 오늘날의 신자들을 또한 기다려주고 계시는 분,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엉뚱하고 멍청한 질문을 드리기보다 “저는 아닙니다!”하는 똑부러지고 단호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성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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