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C.G.융의 ‘분석심리학’을 통한 인간 마음 치료의 시작은 ‘기억’하는 일이다. 즉,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작업이 치료의 시작이다. 그 다음은 내담자가 말하게 한다. 자신의 기억을 말하게 하고, 상담자는 그 기억이 만든 불안과 분노, 그리고 우울을 안전하게 표현하도록 돕는다. 과거의 불편한 기억들은 내담자와 그 가까운 이들이 ‘지금 여기’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게 하며 장애(disorder)를 만들고, 때로는 지옥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미래’마저도 절망으로 만들어 살아갈 의미와 가치를 숨겨버린다. 그래서 치료해야 한다.
치료의 핵심은 ‘재해석’이다. 과거의 불운했던,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그러나 이미 지나간, 변경할 수 없는, 변화시킬 수 없는 사건들을 다시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온전히 ‘지금 여기’를 살면서, 다가올 ‘다음 저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치료하고 치유한다. ‘치료’는 제3자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치유’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다.
어디가 성전(聖殿)인가?
한 사람 삶의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역동은 민족, 국가, 공동체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우리가 끊임없이 역사를 돌이키는 이유는, 그 역사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역사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 수 있는 마음 ‘의식’을 통해 자각하는 ‘부조리’한 상황과 상태 안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 ‘천벌과 지옥’, ‘영생과 천국’ 등을 팔아먹는 부정직한 종교적 희망을 통한 비약이나,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삶을 종결하는 것은 지혜로운 해결책이 아니다.
세상과 인간의 부조리는 우리가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조리와 투쟁하는 의식의 공간은 ‘광야’이며 ‘성전(聖殿)’이다. ‘광야’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사유하고, 깨달음을 얻으려 몸부림친다. 선한 영향력을 펼쳐내기 위한 작은 ‘떨림’과 ‘울림’의 진동이 성전에서 꼬물꼬물 흘러나온다. 성전은 근사하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한복판이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모여들어 촛불을 밝히는 이들은 아스팔트 거리를 성전으로 거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록한다. 영상으로, 사진으로, 글로, 말로 역사를 저장하고 있다. 제단 위에는 갈수록 많은 촛불이 타오른다. “로마가 불타는 동안에도 수도원 안에서 영원을 찾으려고 애쓰던 수도승”을 연상했던 제프리 바라클로프를 돌이키며, 대한민국이 불타고 무너지는 동안에도 성당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찰 안에서 ‘사랑과 희생’, ‘해탈과 열반’이라는 고상한 말들을 꿰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기억, 세월호에 대한 기억,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기억,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 일제 강점기에 대한 기억 등은 고스란히 우리의 유전자 안에 기록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그 기억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부조리들과 불의들이 현실 세계에서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속 깊은 물음을 던져놓는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치권력을 통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들이 심각한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소위 ‘뉴라이트’라 불리는 궤변론자들의 주장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역사학자 주진오는 장 세노의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번역하면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깊어 갈수록, ‘역사에 대한 깊은 갈망’은 솟아오르고, 부정직한 왜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적 행동이 요구된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의 시작이다. 지난 역사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했던 독일은 서서히 그들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졌고 치유되어, 동서독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이제 유럽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반면, 끊임없이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은 과거의 트라우마 속에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태평양으로 핵폐기 오염수를 방류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고, 또다시 지구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떠넘기려 전쟁범죄 이상의 끔찍한 지구파괴라는 환경범죄를 기획하며 전 세계의 비난을 받고 있다. 역사를 지우려는 뉴라이트의 노력으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해군 일제 전범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있어서도 죄를 지은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니라, 국내 재단이 국내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공식 발표했다. 후쿠시마에서조차 어민들을 위한 대책 마련에 일본 정부가 애를 쓰고 있다는데, 정작 우리나라 어민들의 정당하고 당연한 분노는 ‘괴담’이 되어버렸다. 해양 생물학자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학문적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그는 '괴담 유포자'가 되어 고발되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는 미래의 문을 열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된다. 미래가 없는 과거는 지배자들의 것이다. 그러한 과거는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며, 또 다른 장애(disorder)와 피해를 양산한다. 역사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소환하는 것은 치료를 위한 전제이며, 미래를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상상(想像)을 일상(日常)으로
지금 우리는 정권을 교체하는 것 이상의 상상(想像)을 일상(日常)으로 가져와야 한다. 희망과 대안이 적절하지 못하니 민중은 방향을 잡고 싸움에 투신할 수 없게 된다. 자극적인 선동이나 일회적이고 단기적인 방편이 아니라, 대의와 명분을 바로 세우고, 미래를 향한 위대한 비전과 방향을 줄 수 있는 리더를 세워야 한다. 보스와 리더는 엄연히 구별된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하지만, 리더는 앞에서 이끈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하지만, 리더는 “가자!”라고 말한다. 보스는 겁을 주며 복종을 요구하지만, 리더는 희망으로 힘을 끌어낸다. 보스는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지만, 리더는 대화하고 타협한다. 보스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쉽게 번복하고 부인하지만, 리더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진다. 우리는 지금 어리석은 보스를 뽑았고, 리더를 할 수 있는 자들은 줄줄이 우리 곁을 떠나갔거나,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여있거나, ‘젊잖은(젊지않은)’ 언론들의 횡포에 초죽임을 당한 상황이다.
발악(發惡)하는 자에게는 발선(發善)으로
전주, 서울, 마산, 수원, 광주, 춘천, 의정부, 인천, 원주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원주 시국미사 성명서의 마지막 부분의 울림이 크다.
“슬프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꿈. 너만 목숨이 있다더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들, 물속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것들도 제각각 귀한 목숨을 가졌으니 다 같이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이루자는 아름다운 꿈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사람이 사람답기란 이토록 힘든 일일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비극과 몰락의 시간 속에 환희와 영광의 때를 간직하는 무덤의 비밀을. 발악(發惡)하는 자에게는 발선(發善)으로 맞서자. 사랑은 지치는 법이 없다. 꺾이지 않는 사랑을 나누어 갖자.”
(2023년 6월 12일, 원주교구 봉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