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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써 계명을 지키는 사람
  • 이기우
  • 등록 2023-09-22 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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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토요일(2023.9.23.) : 1티모 6,13-16; 루카 8,4-1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겪은 사람들에 대한 체험을 담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겪으신 부류는 길바닥에 떨어져 짓밟히기도 하고 새 먹이로 먹히기도 하는 씨앗처럼, 말씀을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즈음에도 십 년을 하루같이 미사에 다녀도 하느님의 말씀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신자들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두 번째로 많은 부류는 바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씨앗처럼, 아무런 고민이나 생각이 없이 건성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구경꾼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미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보러’ 다닙니다. 그러므로 미사를 마치자마자 아무것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듯이 미사를 보기 때문에 충동적이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자극이 없는 한 도통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져서 일정 길이 이상 자라지 못하는 씨앗처럼, 신앙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예비자 시절의 유아적인 신앙 수준으로 생을 마감하는 신자들입니다. 마지막 부류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처럼, 십자가로 부활하는 이치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킵니다”(1티모 6,14).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신자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1799년에 천주학 강학회를 마치면서, 정약전과 권상학과 이총억 등 3인의 선비들이 합작하여 남긴 ‘십계명가’(十誡命歌)라는 천주가사가 있습니다. 


세상사람 선비님네 이 아니 우스운가 / 사람나자 한평생에 무슨 귀신 그리많노

각기 귀신 모셔봐도 허망하다 마귀미신 / 허위허례 마귀미신 믿지 말고 천주 믿세

죄 짓고서 우는 자요 천지신명 왜 찾느뇨 / 가난하여 굶주린 자 조물주는 왜 찾느냐

음양태극 선비님네 상제상신 의논하소 / 말이 일러 달랐으되 이 모두가 천주시네

천주 이름 거룩하사 대고말고 론치 말소 / 세상사람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일곱날 중 엿새 간은 근면노력 다하고서 / 일곱째 날 고요히 천주공경 하여보세

갑론을박 쉬지 않고 논쟁구궐 무용일세 / 천지고금 만물지사 부모효도 으뜸일세

인간금수 초목만물 그 아버지 천주일세 / 부모효도 알고 나면 천주공경 알고지고

영원불멸 큰 은혜 하시필경 얻어지네 / 전장에서 적을 죽여 충신 된다 하여도

또한 내가 갈 길 없어 스스로 자결해도 / 이 모두가 천주 뜻을 알지 못한 죄라 하네

이제라도 천주 뜻을 사람마다 지켜보세 / 이 세상에 내가 남은 천주 뜻과 부모 공일세

너희 어미 딴 곳 가서 외도한 후 너 낳았다면 / 너는 또한 세상보고 무슨 행신 어이할고

간음사행 멀리하여 천주 뜻이 인간되자 / 도적이란 크고 작고 인륜에 큰 죄일세

마음 속에 도적할 맘 큰 죄 된다 못할소냐 / 도적질해 자손까지 안 망한 자 보았느냐

큰 의를 내가 먼저 창창세세 전해보세 / 국운이 기울어져 흥망성세 뚜렷하네

간신소부 까막까치 헐뜯어서 싸움일세 / 한마음 넓게 눈 떠 천주 큰 뜻 알고 나면

벌레같은 인간세상 군 뜻이 전혀 업네 / 만인의 소원이란 부귀공명 재복이라

제 일 분수 지켜가지 남의 소유 탐치 마소 / 만악의 근원이 이로 하여 일어나네

세상 갖은 화근들이 필연코도 과화같다 

<현대어역=김영수 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그 선비들이 십계명에 대해 내린 해석이 담겨 있는데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다시 천주학에서 천주교로 옮겨간 강학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할 뿐 아니라, 그네들이 단지 인격적 천(天)에 관한 지적 관심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실천적 의지로 나아가겠다는 종교적 분위기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조상 대대로 귀신이라 불러오던 하느님 신앙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그리스도 신앙으로 식별하는 신관의 토착화 내지 성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도 드러납니다. 아울러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깨달은 바를 한글로 된 가사, 그것도 4·4조 운율에 맞춘 가사로 지어낸 것에서, 한문을 모르는 민간 대중에게도 알리려고 했던 선교 의지도 드러납니다.


바오로도 티모테오에게 목자의 직무를 맡기면서 지시하는 권고의 마무리로서 흠 없이 또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라고 강조하였습니다(1티모 6,1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들은 군중이 믿음을 받아들여 계명도 잘 지키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따르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씨앗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에 주목하게 되는 까닭은, 이즈음 우리네 교회의 신자들이 계명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형편이 지극히 심각하고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바쳐야 한다는 계명을 우습게 보는 것은 기본이고, 주일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고해성사로 영혼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계명조차 마구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 복음 환호송).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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