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화요일(2023.10.31.) : 로마 8,18-25; 루카 13,18-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여정에서 고난을 겪더라도 희망을 간직해야 함을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권고하였습니다. 우리 겨레의 희망을 상징하는 나라 꽃은 무궁화입니다.
무궁화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반도는 물론 저 만주 벌판 어디에서나 피어 있었던 꽃이었습니다. 백 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이 겨레를 총칼로 짓밟으며 일제는 손에 쥔 태극기만 빼앗았던 게 아니라 무궁화가 피어나던 동산도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태극기도 무궁화도 모두 겨레의 얼을 알려주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레의 마음속에 피어난 무궁화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남궁억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던 배화학당 여학생들에게 무궁화 꽃을 한반도 지도 위에 수를 놓게 해서 일제가 없애버린 무궁화 동산 대신에 이불에도 식탁보에도 무궁화 꽃이 피어나게 했고, 당시에 어린이들이 즐겨 하는 놀이에다가도 이 무궁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마다 무궁화 꽃이 노래로 피어나게 했습니다. 애국지사로서 그는 자라나는 세대로 하여금 겨레의 얼을 잊지 않게 해서 언젠가는 겨레의 마음속에 피어있는 이 무궁화 꽃을 삼천리 화려강산에 피어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궁화가 실제로 삼천리 강산에 만발하던 시절, 신라에서는 젊은이들의 머리에 이 무궁화 꽃을 꽂아 주어 ‘화랑(花郞)’이라고 부르며 엘리트로 길렀으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576년), 이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서도 신라를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의 나라’라고 적었을 정도로 이 땅에는 무궁화가 흔했습니다(崔文昌 候文集, 897년).
흔히 나라 꽃은 왕실에서 좋아하는 꽃으로 삼지만, 조선 왕실에서 이(李)씨 가문의 상징인 오얏꽃과 발음이 같은 배꽃을 좋아해서 이화(梨花)를 왕실 문장에 넣었어도 나라 꽃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수천 년부터 우리나라 산과 들에 흔하게 피어나던 무궁화를 백성들이 좋아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어느 꽃이든지 한 번 피면 열흘을 넘기기 어렵지만, 무궁화는 봄부터 가을까지 몇 달 동안이나 피고 지었다가 또 피고 지기를 무궁히 되풀이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무궁화의 학명(學名)은 ‘Hibiscus syriacus’로서 시리아에서 자생한 꽃이고, 시리아 인근 카르멜 산 북부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을 따라 요빠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샤론 평원에서 철따라 피는 꽃이라서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라고도 부릅니다(1역대 27,29; 아가 2,1). 무궁화가 성서에도 등장하는 이유는 생김새가 수난의 메시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 잎사귀의 흰 색은 마치 하느님께 대한 순결을 상징하는 듯하고, 꽃 중심부의 붉디붉은 색깔은 백성을 위해 흘리신 그 수난의 피를 생각나게 하는가 하면, 꽃대의 노란황금빛은 역사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부활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렇게 무궁화는 예수님을 닮은 꽃입니다.
그래서인지 최민순 신부는 우리 교회 최초의 사제요 우리 겨레에게는 예언자였던 김대건 신부를 기리며 “진리의 찬란한 빛을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라고 읊었습니다. 조선 조정의 불의한 박해에 맞서 순교한 김대건에 이어 또 하나의 떨기로 피어나 일제의 불의한 침략에 맞선 겨레의 무궁화가 있으니, 그가 안중근 토마스입니다. 의로운 선비(義士)로 불리우는 그가 114년 전 10월 26일에, - 불과 닷새 전입니다 - 만주 하얼빈에서 민족의 혼을 일깨웠습니다, 정의의 찬란한 빛을 담뿍 안고 또 한 떨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오늘 독서에서 일깨워주듯이,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김대건과 안중근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비추어 보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대건의 시대에는 국운이 기울어가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억눌려서 백년간이나 믿는 이들이 2만 명이나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고, 안중근의 시대에는 그예 국운이 스러져 2천만 동포 모두가 자유를 빼앗기고 일본인들의 노예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김대건은 칠흙같은 암흑 속에서도 “이 땅에 거룩한 주의 나라 펴주소서” 하고 기도하며 순교하였고, 안중근은 한중일 세 나라가 사이좋게 평화를 누리어 동양평화에 앞장서는 그날을 꿈꾸며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지어주었다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겨레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숨막히던 조선 시대, 가장 어두웠던 그 시대에 천진암에서 천주학을 논하고 천주교를 믿기로 하면서 이 땅을 복음의 씨앗을 들여온 선각자 선비들의 꿈도 생각합니다. 심산유곡 척박한 땅에서 흙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면서 복음진리를 실천하는 교우촌을 이루다가 형장의 이슬로 순교한 숱한 신앙 선조들이 지녔던 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최초의 사목자 최양업이 조선 팔도를 누비며 교우들을 격려하고 성사를 집행하면서 교우들에게 심어주려 애썼던 꿈도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꿈처럼 우리의 꿈도 겨자씨처럼 자라나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교성월의 마지막 날에 제가 꾸는 꿈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