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금요일(2024.1.19.) : 1사무 18,6-19,7; 마르 3,7-12
오늘 독서에서 사울 왕은 다윗을 해치려고 3천 군사를 데리고 찾아 나섰지만, 공교롭게도 다윗이 숨어 지내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뒤를 보다가 겉옷 자락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건의했지만, 다윗은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를 해칠 수 없다며 사울 왕을 살려 주었습니다. 민심을 얻은 다윗을 시기한 나머지 죽이려고 했다가 아들 요나탄의 충정어린 만류에 죽이지 않겠다고 맹서했던 사울은 그 맹서를 뒤집는 소인배스러운 짓을 했지만, 다윗은 그와는 반대로 대인배다운 아량을 사울에게 발휘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복음의 가르침을 듣고자 당신을 따르던 군중 가운데에서 열두 사람을 골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기적 소문을 들은 이들이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몰려들어 일손은 모자라고,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까지 끌어들여 당신을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머지 않아 닥쳐올 일을 내다보시고 먼저 뽑은 네 사람을 포함하여 모두 열두 제자를 뽑으신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당신을 도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쳐서 언젠가 당신의 죽음이 닥치면 복음 선포의 일을 계승하도록 대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협조자와 미래의 계승자를 위한 양성, 이것이 악의 야합에 대비한 선의 연대라 할 것이고, 당신의 삶을 계승할 사도로 양성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선교사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열두 제자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해 놓았습니다.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으로부터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시몬의 동생인 안드레아, 벳사이다 출신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필립보, 나타나엘로 불리었던 바르톨로메오, 세리였던 마태오, 의협심이 강하면서도 합리주의자였던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인 소(小) 야고보, 예수님의 친척 형제로서 ‘유다’라고도 불리었던 타대오와 또 다른 시몬,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설정하신 의도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도들을 뽑은 목적을 세 가지로 전해주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복음적인 삶을 배우는 사도로 양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선교사로 파견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어서 세상의 죄를 없애는 사명을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3,14ㄴ-15).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시며 하느님 아버지를 닮으신 아드님으로서 성부와 같은 반열의 하느님으로서 믿는 이유가 위의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오로를 비롯한 교회의 선교사들이 이 복음을 전한 서양에서 역법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역사의 기원으로 삼고 세상에서도 이 서력법을 따르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부여하신 사명, 즉 부르심의 세 가지 이유는 오늘날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사명이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 각 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평화스럽게 될 수 있는 길과도 통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구세주이시요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려는 이는 우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제자들이야 그분이 부르시자 함께 지낼 수 있었으므로 물리적으로도 함께 살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시대와 공간을 달리 하여 살아가는 우리들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분의 신성을 믿고 체험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마귀를 쫓아내어 세상의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은 성사생활과 기도생활의 실천입니다.
성사와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일은 믿는 이들에게 실제로 두 가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원죄에 물든 인류를 화해시켜 주심으로써 천국의 문을 열어젖히신 영적 혜택을 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당신 성령을 보내주신 덕분에 성령의 기운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영적 혜택까지 누리는 것입니다.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 죽이겠다고 쫓아온 사울 왕을 겨우 몇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쫓기던 다윗이 일당백의 기개로 궁지에 몰린 사울을 의롭게 살려줄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영적 혜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도 성사생활과 기도생활을 쉬고 있는 냉담자들은 물론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 심지어 온갖 종류의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는 영적 기반 역시 예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의식일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네 혼이 그분의 영과 소통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은 지금 살아가고 활동하는 자리에서 삶과 활동으로 여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요 지금이 구원의 때라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성서를 가르치거나 교리를 알리는 일만이 아닙니다. 성서와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활동을 함으로써도 얼마든지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 범주에 속하는 일입니다. 다만 이 넓은 의미의 치유, 즉 공동선 증진 활동이 ‘기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이끌어내는 일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동전의 양면처럼 둘째 원칙과 맺어져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증거해야 할 복음은 특히 마귀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맺어지는 관계에도 어김없이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개인적이든 구조적이든 악의 희생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선을 실천함으로써 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둘째 원칙이 우리의 삶을 겨냥한 것이라면, 이 셋째 원칙은 우리의 일을 겨냥한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이 셋째 원칙을 실천하기 위한 3단계 방식을 가르칩니다.
제1단계는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아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인지를 알아내는 관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게 됩니다. 인간 현실의 구원에 있어서 육신 위주로 바라본다든가, 육신의 생명이 존재하는 현세 위주로 바라본다든가 또는 세상과 인생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온갖 문제들을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해결하려든다든가 하는 시도는 하느님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현세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현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에 문화적이면서도 역사적이며 육신 생명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인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는 이른바 가치의 실현이라는 본질적인 관점입니다.
제2단계는 관찰된 악을 몰아내기 위하여 과연 어떠한 선이 필요할 것인지를 식별하는 판단입니다. 무릇 모든 악은 선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빛이 사라지면 일부러 불러들이지 않아도 어둠이 찾아오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이 경우에 필요한 선은 개별적인 선행일 수도 있고, 공동선의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에서도 세상을 어지럽히고 개인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제3단계는 관찰된 악과 판단한 선을 바탕으로 우리 각 개인들이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활동을 전개하는 실천입니다. 이를 사도직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사도직 활동의 기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대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는 일’ 즉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기본이 되어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며, 재화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사회교리의 주요 원리들이 충족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선택이 기본이 되면 보조성과 연대성과 같은 방법상 원리들은 자연히 충족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이 대륙 주교들이 공의회의 가르침을 반영하여 제안한 삼중 대화, 즉 종교와 문화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이 선택은 기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묵상한 바를 전해 드렸습니다. 그 목적의 대전제가 오늘 복음 환호송에 나와 있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2코린 5,19).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