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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의 기적은 삶과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 이기우
  • 등록 2024-06-19 14: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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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수요일(2024.6.19.) : 2열왕 21,6-14; 마태 6,1-6.16-18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지난 연중 제11주일 이래 이번 연중 시기 제11주간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 복음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자유와 양심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최소한 지상의 평화가 실현된다고 가르친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에 따라서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세상 사물과 사태 그리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의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 치열해야 하고, 그 양심은 오로지 하느님께 집중하여 그분의 말씀과 시선 그리고 심판에 정조준되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를 치열하게 선용함과 양심에 따른 직관으로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구약시대 기원전 8세기 경에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나봇이 부당하게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었던 사태를 계기로 예언 활동을 벌였던 엘리야는 자신의 자유를 치열하게 사용했습니다. 몇 년째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도 극도로 어려워진 터에,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을 백 명이나 학살하고(1열왕 18,13. 22.; 19,14 참조) 바알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나라 전체에 퍼뜨리던 이제벨 왕비와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카르멜산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4백 5십명이나 되는 거짓 예언자들이 섬기던 바알신은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반면에 엘리야가 홀로 섬기던 야훼 하느님께서는 불길을 일으켜 제물로 바치려던 황소 고기를 불태워 주셨기 때문입니다(1열왕 18,20-40 참조). 그러자 긴 가뭄도 이와 동시에 끝나버렸습니다(1열왕 18,4146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불과 비로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직후, 분노한 이제벨 왕비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바람에 호렙산까지 피신하여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극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엘리야는 거센 바람이나 지진 또 불길 속에서도 숨어 계시던 하느님께서 부드러운 미풍 속에서 자신에게 마지막 사명을 일러 주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열왕 19,11-12 참조). 


그 사명의 첫째는 아합왕을 심판하여 교체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고 나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었습니다(1열왕 19,15-16 참조). 엘리야는 이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표징에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양심을 통해 들려오시는 그분의 엄중한 말씀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불 말이 이끄는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오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2열왕 2,11 참조).


제자가 보는 앞에서 스승이 회오리 바람에 실려 불 말들이 이끄는 불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이 승천의 장관은 엘리야가 수행했던 직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들여졌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엘리사가 물려받는 직무도 천상의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아울러 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상황도 치열했었고 직무는 한층 더 치열했었습니다. 엘리야가 활약했던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암담한 것이었고,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엘리야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나병에서 고쳐줄 때에도, 바알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대결할 때에도, 이세벨 왕비의 군대에게 쫓겨서 시나이 반도의 호렙산까지 도피할 때에도 평안한 나날은 없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임했습니다. 그렇게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아 전투적인 일생을 살면서 고생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불 말과 불 병거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후 엘리야의 이름은 그 세기적 대결이 벌어졌던 산의 지명인 카르멜과 함께 화려한 승천의 기적을 보여준 불 병거의 이름으로 후세에 남았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선용하여 양심에 충실하게 하느님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는 승리의 표지였습니다.


이렇듯 치열하게 자신의 자유를 선용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직관으로 양심에 충실했던 엘리야와 달리, 예수님 당시에 유다교의 엘리트들 특히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신 율법에 따라 세상을 설명하고 사회생활에 관한 규범을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고, 하느님께 진정성 있게 보여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 종교 행위였던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있어서 대표적 유다인들로 자부했던 바리사이들은 자선을 드러내 보이고, 기도를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하며, 단식 역시도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듯이 티를 잔뜩 내면서 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행태를 위선으로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성 있게 실천하라고 하신 뜻은, 자선이나 기도나 단식 등 본시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생겨난 종교적 관행이 그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 취지대로 가난한 이웃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자선이란 가난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행위이지만 얼마를 내놓았다는 액수가 더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내가 기도하고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식 역시 굶어서라도 굶고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한 몫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단식 그 자체가 주목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은 자비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가난한 이들이 차지했어야 할 몫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나누어야 한다고 보셨던 것입니다. 자선에 대해서 자비가 아니라 정의라는 가치라는 안목으로 의식을 전환시키는 문제는 기도의 영역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 위해서는 단식을 해서라도 가난한 이웃과 나눌 몫을 마련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야 할 만큼 세상에는 가난한 이웃이 많이 있고, 평등의 과제는 일생동안 매달리고 씨름해야 할 숙제라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선을 행하는 자유와 하느님을 직관하는 충실한 양심은 엘리야가 입은 승천의 은총을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진정한 기적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의 사건과, 사람이 되신 그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 사건입니다만, 이 강생과 부활 사건보다 더 큰 기적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못 박혀 죽는 희생을 자원하여 받아들이셨다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생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위해 일어난 기적이요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래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 이 세 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기반 기적이지만 가장 큰 기적은 십자가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 병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은 이 세 가지 예수님의 기적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이룩될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며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 삶에서 이룩된 거룩한 변화로부터 세상에서도 일상적 사랑의 활동 – 자선과 기도와 단식 같은 - 에서 나타날 변화를 지향합니다. 


이런 행위들이 지금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나 활동으로 보이지만, 이 행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일치하여 그런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을 때,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것은 엄연한 사랑의 기적인 것이고, 거룩한 변화의 기적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재림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려는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이고, 그분이 계신 곳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네 삶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즉 승천의 신비가 실현되는 것이 됩니다.


성체성사의 진리는 거룩한 변화의 진리요, 이는 성체의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애덕 행위나 대단히 당연한 정의의 의무라 할지라도 비범한 정성으로 행할 수 있다면 기적은 일어나고야 맙니다. 그러고 보면 성체의 기적은 제대에서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과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를 기적으로 알아보는 안목이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애덕 활동을 하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보여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보여드리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도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갚으려는 정성으로 하고, 기도를 할 때에도 하느님께 말씀드리려는 친밀함으로 하며, 단식할 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들으려는 치열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성체의 거룩한 변화를 본받아 우상 숭배와 맞설 때마다 엘리야 예언자가 펼쳤던 카르멜산의 대결이 영적으로 재현됩니다. 사회적 불의에 직면하여 거룩한 의로움을 느낄 때마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과 이제벨에게 준엄하게 경고한 엘리야 예언자가 됩니다. 일상적인 종교적 행위들,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 행위로 삼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불 말이 이끄는 불의 병거가 하늘로 올려다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 사명을 넘겨주신 것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카리스마를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기꺼이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미덕을 발휘할 때마다, 또 다른 엘리사들이 새로운 카리스마를 받고 충만해집니다. 숨은 일도 빠짐없이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과정에서 이를 기억하시고 반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께서 하셔야 할 역할을 빼놓으시거나 놓쳐 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의식하시고 하느님을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유를 치열하게 선용하고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직관함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는 비결입니다. 숨은 일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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