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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입니다”
  • 이기우
  • 등록 2024-08-09 10: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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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2024.8.10.) : 2코린 9,6-10; 요한 12,24-26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3세기 초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난 그는 신앙이 출중하여 당시 교황 식스토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 교회의 부제로 임명받아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때여서 당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박해를 가했는데, 라우렌시오에게는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그 가난한 이들을 박해자들 앞으로 데려가서는,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라우렌시오가 기지를 발휘하여 행한 이 처사와 그의 이 말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그를 화형에 처했으니, 서기 258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이 발언은 교회의 신앙에 대한 증언이었으니, 그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입니다.


우리는 라우렌시오가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던 신앙 증거의 행동과, 순교를 각오하고서 박해자들에게 했던 말, 즉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보물”이라는 증언을 통해서 당시 교회가 얼마나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시던 예수님의 계시적 명령이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왜 빠졌는지도 덤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고대 교회 당시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화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입는 일임을 너무나 뚜렷하게 의식하고 행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문자로 명시해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당연한 현실은 구태여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는 법이지요. 


하지만 공식적인 신앙 고백에 명시되지 못한 결과는 고대 교회 이후 중세와 근세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그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명심하지 못한 채 자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혁명 이래로 가난한 이들이 대량으로 그리고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었고 갈수록 빈곤의 대물림이 심해지고 있었으므로 역대 교황들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반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핵심 명제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고, 급기야 전 세계의 주교들까지 모두 모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사목헌장의 첫 머리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간직해야 할 기쁨과 희망이어야 하고, 함께 겪어야 할 슬픔과 번뇌여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현대 가톨릭 윤리신학의 대가로 알려진 성 알폰소 주교 학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복음적 의무와 함께, 하느님은 사랑이심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한 행적을 놓고 심판을 받을 것임을 지킬 계명의 교리인 윤리신학의 명제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기쁨과 희망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간직하고자 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과 번뇌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겪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본을 보여 주셨고, 이렇게 애덕을 실천하는 삶을 반드시 최후의 심판에서 평가하시겠다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한 이유와 목적은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분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셔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을 기회조차 사라집니다. 그러니 한낱 자선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일은 결코 아닌 겁니다. 


그러니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는 이 당연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온 삶으로 일깨워 준 성인이라 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세속적인 잣대로 볼 때 부러진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마치 하느님을 섬기듯이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루카 10,21-26 참조).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그저 자선을 베푸는 행위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치는 척도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서 경제가 그토록 성장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늘어나고 있고 빈부격차는 날로 벌어지고 있으며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대에 들어서 의학과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약도 좋아졌으며 병원과 의료인력도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는데다가 불치병자들도 여전히 많은 원인은 하느님께서 우리 몸에 주신 자연치유력 즉 면역력을 키우려 하지 않는 데 있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와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복음과 라우렌시오의 증거를 명심하지 않고 그저 한낱 자선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면 사태는 개선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천동설이나 낙수효과 이론에서 보는 것처럼, 사태를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려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관점과 또는 부활신앙의 관점과는 정반대로 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이들의 기쁨과 희망을 우리의 기쁨과 희망으로 삼는 일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고, 고통 받는 이들의 슬픔과 번뇌를 우리의 슬픔과 번뇌로 삼는 일이 우리 신앙을 활성화시키고 우리 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활성화된 우리 신앙과 복음적으로 쇄신된 교회의 활력이 복음화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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