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2024.8.30.) : 1코린 1,17-25; 마태 25,1-13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 동안 하시던 복음 선포 활동을 얼추 마치신 예수님께서 생애 최후의 순간에 맞이하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열 처녀의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뒤를 이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슬기롭게 선포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독서에서는 예수 부활 이후 사도로서 소명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가 슬기로운 복음 선포 활동의 핵심으로서 십자가의 지혜를 코린토인들에게 갈파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사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진리야말로 하느님의 표징이요 지혜로서 복음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는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기성 사도 출신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정통 노선을 계승한 셈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당부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한 기성 사도들이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갈라 2,7-9 참조) 말하자면 그는 주님을 맞이하러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십자가의 지혜라는 복음 선포의 기름을 준비하여 기성 사도들보다 더 어려운 길을 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온 유다인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바오로는 하느님을 모르고 다신교 풍습에 젖어 우상숭배에 물든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유력한 세력들 가운데에서 사두가이파도, 바리사이파도, 젤로데파도 에세네파도 선택하지 않으시고 의롭고 거룩한 예언자의 길을 걸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바오로는 율법에 열성적인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사도들의 세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신자들의 추천과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도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베푸는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모으셨고 이 백성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바오로도 세례를 주라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다는 자의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코린 1,17 참조)
예수님의 복음선포 행적을 보고 가르침을 들은 이들 가운데 열두 명은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라 다니며 함께 사는 제자 공동체를 이루었고 나머지들은 자기가 살고 일하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소아시아 일대와 그리스 전역을 누비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공동체를 살아가도록 선교하였고 그가 세운 공동체들에게 보낸 편지가 오늘날 신약성경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결과 소수의 제자들과 얼마간의 지지자들을 얻으셨지만 더 많은 반대자와 적대자들이 생겨나서 당신 자신은 십자가형을 받아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했고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오로 자신도 복음선포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서 세 차례의 선교여행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이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그분의 가르침을 전했지만, 세례를 받은 이들 중에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들 가운데 냉담하는 비율이 90%에 가깝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라는 유럽에서는 더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리 교육과 세례를 주는 이른바 전교활동이 잘못 되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성사로 입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이 믿음의 내용으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지혜가 전해지지 않으면 세례는 아무런 힘을 지니지 못합니다. 자칫하면 세례가 십자가의 수난 대신 값싼 축복의 기회 수단으로 여겨져서 세례자 증가가 곧 냉담자 증가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타락시키는 사탄이 기승을 부리는 현세에서 이 사탄과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억누르는 지혜를 배우지 못한 채로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를 생략한 전교는 어리석은 선교가 되고, 십자가의 지혜를 전달한 전교는 슬기로운 선교가 됩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채 세례를 받아 교회에 들어온 얼치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지혜를 말재간으로 전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세워지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전했기에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 개척한 선교의 여정이 유럽의 복음화로 이어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북방 선교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 이즈음 우리는 어리석은 선교가 아니라 슬기로운 선교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