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50년이 다 되어가는 단체이지만 아직 따로 가입이나 탈퇴 절차가 없습니다. 회원명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회비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모임 안내와 작은 소식 정도가 우편을 타고 날아옵니다. 저는 모임의 간부도 아니고, 임원도 아니고, 그저 나라가 어려울 때 고지를 전해 받고, 시간이 나면 서울 시청이든 광화문이든 머릿수 채워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저에게 사제단 50주년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명절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궁싯거렸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님은 기쁨과 희망연구원이 주최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5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고 때로는 빈약하게 때로는 활발하게 활동해 온 단체가 어째서 뿌리를 같이 해온 교회와는 이처럼 물과 기름이 되어야 하는 걸까?’라는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사안에 따라서는 전국 사제의 1/3 이상이 참여할 정도로 많은 지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제도교회와 세상 안에서는 늘 뭔가 불편한 단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사제단의 활동이 ‘반대 받는 표적’이어서 ‘올바름을 지향하며 타협 없는 걸음’을 걸어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자기객관화가 필요합니다. 지천명(知天命), 오십은 ‘하늘의 뜻을 알다’라는 의미이지만, 민심은 천심인지라, 더불어 관세음(觀世音), ‘세상의 소리를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경지,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봅니다.
고통, 비극적 사건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중도’ 혹은 ‘중립에 서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이 ‘그들 모두 하느님의 자녀인데 신부가 특정한 정파나 정당의 편을 들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중도(中道)’는 물리적인 가운데를 뜻하지 않습니다. ‘중도(中道)’는 세상과 사물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안목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진실과 진리를 바라보는 치우치지 않는 길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역사적 경험과 성찰을 통해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본인들의 아시아 침략과 폭력은 명백한 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가서 성노예를 만들었던 역사나, 사도 광산에 1939년 이후 약 1,500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강제동원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악입니다. 4.3 제주에서 벌어졌던 극우폭력이나 5.18 광주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국가폭력은 악이었습니다. ‘중도’, ‘중립’이라며 ‘선’과 ‘악’을 벗어날 사안이 아닙니다. 역사적 판단이 끝났지만, 단죄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를 들먹이는 친일파 혹은 현대판 밀정들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왜곡합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한미일 동맹, 독도 해상 군사기지화 등의 의제를 던지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자위대 무장을 간과합니다. 그들의 활동반경이 점차 확대되어 나가는 일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구한말의 국제정세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4.3,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자들이 버젓이 국가 중요기관의 책임자나 위원으로 발탁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4년 8월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어느 기자가 묻더랍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다가가 위로했던 행동들이 정치적으로 오해될 것을 우려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황님은 단호하게 “나는 유가족들과 연대하기 위해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달고 반나절쯤 뒤에 어떤 이가 다가와 ‘떼는 게 더 낫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비극적 사건에 중립적이어야만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기의 순간, 고통의 순간 지킨 ‘중립의 자리’가 얼마나 비천하고 부끄러운지 깨닫는 일 자체가 쉽지는 않습니다. 드러내놓고 악의 편에 붙어 악마가 되는 이들보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실속을 챙기는 자들이 더 큰 악입니다. 그래서 ‘지옥에도 그들을 위한 자리는 따로 없다’라고 단테는 말했습니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해야 하는 싸움
사제단의 역사는 한국민중사의 현장에서 ‘이기는 싸움’을 해 온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싸움’을 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어, 그들은 세상의 불의와 고통의 소리를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으며 역사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대주었고,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겼으며,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지학순 주교님께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사제들은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며 군부독재와 유신헌법 반대를 외치며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이라는 기치 아래 ‘더 세상 안으로, 그러나 덜 세상적으로’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자 헌신했습니다.
이후 80년 5.18 민주화 운동 진상 발표, 87년 6월 항쟁, 89년 문규현 신부의 통일행진, 2003년 새만금 갯벌 살리기, 2003년 KAL 858 진상규명 선언, 2009년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 2013년 박근혜 퇴진 시국미사, 2022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시국미사, 2023년 윤석렬 대통령 퇴진을 위한 시국미사 등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서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습니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이 훼손되는 모든 일에 그 옛날 예수처럼 ‘시비 꾼’이 되어 싸움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라는 개념의 혼란
우리가 지금 당면한 언어와 개념의 혼란과 분열 그리고, 언어도단은 판단과 식별에 커다란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공정과 상식을 ‘슬로건’으로 집권한 검찰 정권의 부정과 부조리 그리고 부패가 차고 넘치는데 자기들을 비판하는 야당과 시민사회를 향해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라고 외치며 ‘인디언 기후제’ 같은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의로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와 수치를 투사하며, 가치에 혼란을 던지고, 가치의 중립을 외치며, 가치파괴의 순서로 국민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갑니다.
명품 ‘백’을 받는 장면이 뉴스에 고스란히 보도되고, 고속도로 종점을 변경한 의혹이나, 주가를 조작한 의혹, 해병대원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숱한 의혹에 둘러싸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수사나 기소도 하지 않고 면죄부를 발급해줍니다. 어떤 이는 뇌물같은 퇴직금으로 50억을 받고도 멀쩡한데, 멀쩡한 장학금이 뇌물로 둔갑하여 고발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입시와 전혀 무관한 대학 ‘표창장 위조(?)’라는 기이한 죄를 만들어, 일가족을 파렴치범으로 악마화했습니다. 야당 대표의 아내가 샌드위치 10만 8천 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라며 앞뒤 없이 언론으로 창피를 주었지만, 정작 법인카드로 노래방에 단란주점을 갔던 여인은 방통위원장에 문제없이 임명되었습니다.
무죄한 이들을 포토라인에 세우고 기소하는 검찰은 국민에게 ‘오십 보, 백 보’, ‘어차피 인간은 다 똑같아’라며, 물타기를 하거나, 정작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상대방의 흰옷에 김칫국물처럼 튀겨 버립니다. 언론은 그러한 검찰의 의혹을 한 치의 의문이나 질문 없이 개처럼 받아 적습니다. ‘정의’, ‘공정’, ‘상식’이라는 단어는 이미 우리 시대에 질식해서 사망해 버렸습니다. 마치 광화문의 태극기가 더이상 가슴에 손을 얹고 기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무지와 반지성,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역사 안에서 사라져 간 ‘정의’가 많습니다. 군부독재의 칼날을 앞세워 권력을 찬탈했던 자들이 만들었던 당이 ‘민주정의당’이었고, 그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한국 사회 진보정당의 맥을 이어오던 ‘정의당’이 이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녹색 뒤로 숨어 버렸습니다.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나 개념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즉시 해야 합니다. ‘정의’와 ‘불의’의 개념 너머에 있는 넓은 광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개념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념을 다 믿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의 다원화된 사회가 말해주는 겸양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해 집니다.
“정의와 사랑이 없으면 평화는 언제나 거대한 환상일 뿐입니다.”
돔 헬더 까마라(1909-1999) 대주교님은 평화는 정의와 사랑을 전제로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를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공산주의자)라고 말한다”라는 말씀은 늘 우리 안의 ‘딜레마’입니다. 구조적인 문제와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당면한 ‘지금 여기’에서의 삶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7일 ‘기후정의 행진’이 있었습니다.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길 위로 나왔습니다. 기후문제가 세상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제단은 이제 다양해져야 합니다. 정치의 정의뿐만 아니라 기후, 생태, 문화, 경제, 예술, 교육, 학문, 언론, 정보유통, 인공지능 등의 다양한 분과의 전문가들과 시민사회 단체들과 결합해야 합니다. 세상과 더 넓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와 불의’라는 개념의 간극(干戟)을 넘어서 넓은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사제들만의 단체가 아니라 남녀 수도자, 평신도, 각 분야의 전문가, 시민사회 단체가 함께하는 연대의 틀, ‘플랫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 여럿이 함께 공명하는 한마디 말은 ‘공동선’입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것보다, 삼척에서 외롭게 석탄발전소를 반대하고 있는 시민운동가에게,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택배 노동자들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은 차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가엾은 시대입니다. 사제는 ‘복음(福音: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제단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경청하는 사제들, ‘세상의 고해성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단’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