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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시선에서 깊이 꿰뚫어 보는 안목까지
  • 이기우
  • 등록 2026-02-07 15:22:12
  • 수정 2026-02-07 15: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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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2026.2.8) : 이사 58,7-10; 1코린 2,1-5; 마태 5,13-16


1. 빛


오늘 말씀의 초점은 빛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알려줍니다(창세 1,3). 과학자들도 우주가 하나의 빛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생겨난 그 빛은 우주의 모든 별들이 생겨난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빛 중의 하나가 태양 빛이고, 지구에 비추어진 이 빛으로 우리가 세상과 사물을 봅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우리 눈이 지닌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시원이 된 그 물리적인 빛보다 더 먼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빛이 생명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한 1,1-4). 그런데 어둠을 비추러 그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지구에 비추어진 태양 빛만을 빛으로 알던 대다수 백성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요한 1,5), 극소수의 아나빔만이 빛으로서 오신 그분을 알아보았고 믿어서 빛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요한 12,46).


2. 세상의 빛


연중 제5주일인 오늘,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마태 5,14). 산상설교를 시작하는 이 말씀은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즉 마치 태양 빛이 떠오르기 전의 여명을 비추이듯이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이라는 빛을 이렇게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새로이 출발하려는 동족 이스라엘에게 전통적으로 지속되어온 단식이 그저 식사 한 끼를 굶는 행위에 그치는 종교적 인습인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절약된 몫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행위로 이어져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다든가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애덕의 실천 행위로까지 이어져야 함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의 제2독서 말씀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른 실천에 대해 고백적으로 진술하는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자면 먼저 모범과 표양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 어린 고백으로 일러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세상의 빛임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3. 너의 빛이 솟아오르리라


새벽 여명 빛과도 같았던 이사야의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산상설교의 말씀이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했던 까닭은 하느님의 뜻을 그저 듣기만 하는 데서 그쳐서는 세상의 죄악을 한 치도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입니다. 그토록 많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어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고 끝내 왕국이 멸망하고 백성 전체가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선행과 나눔을 실천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것입니다. 약하고 두려웠고 또 떨렸지만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려는 실천만이 악에 맞서서 선을 드러낼 수 있고 진리를 증거할 수 있으며 결국 하느님의 빛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듣기만 해서는 믿기에 모자라고, 세상은 하느님을 보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가 걸어간 복음선포 십자가의 길을 본 많은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4. 눈을 뜨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보게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있는 실로암 못에서 태생 소경을 만나셨을 때의 일입니다(요한 9,1).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 어느 것도 본 적이 없었던 그 사람에게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당신이 ‘세상의 빛’(요한 9,5)이시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눈을 뜬 그 태생 소경은 세상을 보게 되자 마자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알아본 첫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도 공생활의 막바지에서 예수님께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청한 것만 보아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래서 하느님을 본 첫 사람이 된 그 태생 소경은 바리사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이를 증언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2-33). 이처럼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면 세상 사물을 볼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태생 소경은 육신의 눈을 뜨게 되면서 영혼의 눈도 뜨게 되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5. 눈의 중요성


우리가 안과 병원에 가면 보게 되는 글귀가 있습니다. “몸의 건강이 천 냥이면 눈의 건강은 구백 냥”이라는 속담입니다. 그만큼 몸에 있어서 눈이 제공하는 외부 정보가 몸이 생활하는 데에 막대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느끼고 수용하는 정보들 중에 시각을 통해서 사람은 70%나 되는 가장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러니 눈이 먼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게 사는지는 눈 뜬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눈이 수집한 시각정보를 종합하고 해석하는 기능은 머리 속에 위치한 시각 중추 세포입니다. 이를 위해 대뇌피질의 절반이 동원되어야 하고 두뇌가 쓰는 에너지의 70%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쉬기 위해 잠을 자거나 또는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려면 눈을 감는 것입니다.



6. 두뇌의 중요성


그래서 눈이 중요하다 해도 더 중요한 것은 머리입니다. 머리에 있는 두뇌가 인체의 많은 지체 중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 두뇌가 지닌 능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씁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물리학자로서 우주의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낸 아인슈타인(1879~1955)이나, 전기를 사용하는 수많은 제품을 고안해 낸 발명왕 에디슨(1847~1931) 같은 천재들도 자기 두뇌 능력의 겨우 10%만 쓸 수 있었다고 하니, 보통 사람들은 아마 그 10%의 절반도 쓰지 못하고 생을 마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많은 정보를 얻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정작 두뇌로는 그 많은 정보의 극히 일부만을 해석해 내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두뇌를 전부 쓰라는 권고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머리로 몸을 통제하고 인간관계를 알아챕니다. 머리가 더 좋은 사람들은 셈을 잘 해서 그 관계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능숙합니다. 머리를 더 쓰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 파악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합니다. 이를 역사의식이라 합니다. 역사의식은 과거의 기억만을 해석해 내는 데에서 머물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전망까지도 내다보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를 사명의식이라 합니다.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눈 덕분에 가능한 인간 고유의 능력입니다. 또한 사회악은 어둠과도 같고 공동선은 빛과도 같아서, 동시대 사회의 사회악을 알아보고 공동선까지도 알아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안목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도 두뇌가 보는 안목입니다.


7. 하느님을 보라


하느님의 빛으로서 세상을 비추어 주러 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세상의 빛’이 되라고 당부하신 뜻은 우리가 역사의식으로나 사회의식으로는 물론 영적인 차원에서도 하느님까지 보는 눈을 뜨라는 뜻이었습니다. 세상을 보고, 몸을 통제하고, 관계를 조절하며 멀리 역사와 가까이 사회를 알아보는 등 피조물들에 관해 보는 안목도 필요하지만 창조주를 보는 영적인 안목까지 갖추라는 뜻입니다.


진리이신 하느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회적 안목이나 역사적 안목도 그렇지만 더욱이 하느님의 영을 받으려면 우리의 혼이 하느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도 혼도 모두 우리 머리 속에 있습니다. 눈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며 두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를 써야 하는 까닭은 마음이 깨끗해져서 진리를 보기 위함이고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서 생기 있는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마태 5,8)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과연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전형이셨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공생활 동안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고 마귀에 들려 고생하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셨는데, 그 경우에 그분은 그네들의 외적인 육신의 상태만을 쳐다보시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해방되고자 하는 영혼의 원의까지 알아보셨고, 이러한 고통을 강요한 이스라엘 사회가 영적으로 병든 모습까지도 알아보셨습니다. 시선이 안목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목은 중풍 병자를 만나셨을 때 중풍을 낫게 하기 전에 죄를 먼저 용서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영과 진리로 참되게 하느님을 예배하게 될 것”(요한 4,23)이라는 복음을 전해주실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마주치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손을 펴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깨우쳐 주심으로써 유다교의 고질적인 병폐도 개혁하고자 하셨습니다.



9. 통공의 진리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뵙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삶이 다릅니다. 진리를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통공하면서 마음이 깨끗한 다른 사람들과도 통공을 행합니다. 그 기운으로 사랑을 행하며 진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가 잠재 역량을 발휘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 바로 이 통공을 통해 사회를 보고 역사를 보며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뇌를 100% 활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눈이 뜨여야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역사의식이나 미래의 전망에 대한 사명의식은 물론, 하느님께서 과거에 하신 업적을 기억하는 것도 또 미래에 이루실 섭리를 예견하는 것도 물론 이 통공의 영역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성서가 그저 고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업적을 알려주고 우리가 하느님과 통공할 수 있는 경로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성령께서 살아 계셔서 이끌어 주시는 성경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지점도 여기입니다. 하느님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 성서도 성경으로 바뀝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의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하되 거기서 그치지 말고 깊이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니는 데까지 나아가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보되 사회의 본질과 역사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내다보시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통공의 신비야말로 어둠을 비추어주는 빛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가 그 통공의 상징입니다. 위로는 하느님과 옆으로는 사회와 역사와도 통공하는 것이 진리요 빛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시편 139,12)는 시편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통공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필진정보]
이기우(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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