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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것이 되지 못하는 지능을 위하여
  • 지성용
  • 등록 2026-09-29 18: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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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프레스 DB



국가가 1,000조 원을 들여 짓는 「지능」은, 과연 누구의 것이 되는가


2026년 6월, 정부는 2029년까지 550조 원, 2035년까지 누적 1,000조 원 이상을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쏟아붓고, ‘전 국민 1인 1 AI 에이전트’의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1) 숫자는 장엄하다. 산이라도 옮길 기세다. 그러나 신앙의 눈은 장엄한 숫자 앞에서 늘 한 가지를 더 묻는다. 그 재화(財貨)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 혜택의 물길은 시골 바닷가의 노인에게도, 산골 마을의 아이에게도 똑같이 닿는가. 아니면 이미 가진 자들의 곳간을 한 번 더 채우고 마는가.


물음은 오래된 것이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 세기 우리는 ‘자본은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고, 이제 우리는 ‘지능은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그러했듯, 이 새로운 물음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 교회는 이미 응답하기 시작했다


2025년 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일에 교황청 신앙교리성(Dicastero per la Dottrina della Fede)과 문화교육성은 「Antiqua et Nova ― 인간 지성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관한 노트」를 발표했다.2) 제목부터가 하나의 신학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복음은 늘 낡지 않은 새로움으로 오지만, 그 새로움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오래된 신비 위에 선다. 이 문헌은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인공지능은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은 주지만, 사고하는 능력은 주지 않는다’. AI는 인간 정신의 추상(抽象)과 감정, 미적·도덕적·종교적 감수성을 결코 담지 못한다. 그것은 도구이며, 도구로서 ‘공동선을 섬기도록 쓰일 수도, 참된 공동선을 훼손하도록 쓰일 수도’ 있다.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그리고 2026년 5월, 레오 14세 교황은 재위 첫 회칙 「Magnifica humanitas ―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을 지키기 위하여」를 반포했다.3) 레오 13세의 「Rerum Novarum」(1891) 반포 135주년에 맞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름이 곧 선언이었다. 130여 년 전, 산업혁명이 노동자를 기계의 부품으로 갈아 넣을 때 레오 13세가 「노동」을 사회문제의 심장에 세웠듯, 오늘 레오 14세는 「인공지능」을 새로운 사회문제(nova quaestio socialis)로 지목한다. 교황은 단호하다. ‘인간은 결코 대체되거나 초월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소수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 되며, 더 도덕적인 AI라 할지라도 그 도덕을 소수가 결정한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첫 번째 격차는 사람과 AI 사이에서 벌어진다


AI 시대의 첫 번째 격차는 반도체의 성능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AI 사이에서 벌어진다. 청년은 생성형 AI로 하루를 설계하지만, 홀로 사는 어르신은 스마트폰의 첫 화면 앞에서 멈춘다. 문제는 기기가 아니라, 그 기기가 열어 주는 세계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공감의 격차’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격차는 곧 기회의 격차로, 나아가 존엄의 격차로 굳는다.


격차만이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은 사람을 잇는 동시에 갈랐다. 에코 챔버(echo chamber)와 확증편향(confirmatio praeiudicii), 가짜뉴스와 딥페이크는 공론장의 신뢰를 갉아 사회를 이념적 쏠림의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Antiqua et Nova」가 허위정보와 감시, 조작을 준엄하게 경고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상처는 기술로만 아물지 않는다. 시민이 스스로 묻고, 비판적으로 살피고, 다른 의견과 마주 앉는 힘, 곧 시민교육을 삶의 자리에서 길러야 치료될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진영의 언어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가 함께 서야 할 공통의 땅, 곧 공동선의 언어다.


공동선의 네 기둥으로 다시 읽다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사목헌장」은 이렇게 정의한다. ‘집단이든 그 구성원 개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쉽게 이루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總和).’4) AI라는 새로운 힘을 이 오래된 잣대에 비추어 읽을 때, 네 개의 기둥이 선다.


첫째, 인간 존엄(dignitas humana)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며, 그 존엄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AI가 아무리 인간을 모방해도 그 모상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기술은 인간을 섬기는 자리에 서야 하며, 인간을 대신하는 주인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둘째, 재화의 보편적 목적(destinatio universalis bonorum)이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쓰도록 정하셨다.’5) 초대 교회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듯’(사도 2,44-45), 오늘의 새로운 공동재(共同財)인 지능 또한 특정 계층의 배당이 아니라 만인의 몫이어야 한다. 1,000조의 열매가 소수의 곳간에 고인다면, 그것은 이미 공동선의 훼손이다.


셋째, 보조성(subsidiarietas)이다. 상위 공동체는 하위 공동체를 삼키지 않고 떠받쳐야 한다. 「Antiqua et Nova」 역시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AI가 ‘모두의 선을 위해’ 쓰이도록 보조성의 원리를 청한다. 국가가 정책을 총괄하되, 시민에게 가장 가까운 중간 공동체 ‘비영리 법인, 지역의 배움터, 그리고 본당’ 가 현장을 맡는 구조가 바로 이 원리의 육화(肉化)다.


넷째, 연대(solidaritas)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연대를 ‘막연한 동정심이나 피상적인 안타까움이 아니라, 공동선 곧 모든 사람과 각 개인의 선에 투신하려는 굳고 항구한 결의’로 정의했다.6) 연대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며, 시혜가 아니라 정의다. 청년이 노인과 나란히 앉아 AI 앞에서 함께 헤매고 함께 배우는 일, 그것이 연대를 통한 구원(salus per solidaritatem)의 가장 낮고 구체적인 모습이다.


비어 있는 방들 ― 우체국과 성당의 새로운 소명


그렇다면 이 신학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놀랍게도, 땅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먼저 우체국이다. 우체국은 국가가 만든 최초의 ‘연결망’이었다. 편지가 산골과 외딴 섬까지 닿았다는 것은, 국가가 가장 외진 국민 한 사람도 잊지 않았다는 약속이었다. 그 망은 지금도 살아 있어, 전국 약 3,400여 개소가 읍·면 단위까지 뻗어 있다. 다만 디지털 전환으로 편지가 줄며 그 공간이 비어 간다. 사라지는 업무의 자리에 새로운 공공 서비스를 앉히는 것 ― 「AI 시민센터(AI Civic Hub)」로의 전환은, 200조·1,000조를 새로 짓는 거대 담론 대신 이미 국민 곁에 있는 인프라를 되살리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그런데 우리 곁에는 또 하나의 비어 있는 인프라가 있다. 성당이다. 평일 오전 미사와 공동체 모임의 시간을 빼고, 주말과 주일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시간에 성당은 텅 비어있다. 본당의 많은 방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비운 채 침묵한다. 교육관과 소회의실, 만남의 방과 사랑방이 그러하다. 이 비어 있는 방들을 지역 공동체에게 여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에 던지는 말을 ‘하라’에서 ‘우리가 먼저 한다’로 바꾸는 자기 개입이다.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의 집이 곧 교회의 집(domus ecclesiae)이었듯, 본당은 미사의 공간이자 공동체의 공간이다. 우체국이 ‘국가의 모세혈관’이라면, 본당은 ‘은총의 모세혈관’이다. 두 유휴 인프라가 나란히 AI 시민센터의 거점(node)이 되어, 어르신의 손을 잡고 AI로 병원을 예약하고, 소상공인이 홍보물을 만들도록 돕고, 청소년에게 가짜뉴스와 딥페이크를 분별하는 눈을 길러 준다면, 그때 성당의 빈방은 자선의 창고가 아니라 정의의 실습장이 된다.


이 일을 감당할 사람도 이미 우리 곁에 있다. AI 시대의 「디지털 사회복지사」로 양성된 청년들이다. 이들은 기술의 전달자가 아니라 사람과 AI를 잇는 중간 전문가이며, 안정된 일자리 위에서 가장 작은 이들의 곁을 지키는 공공의 코디네이터다. 투쟁하는 사랑(caritas militans)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비어 있던 방에 불을 켜고 의자를 놓는 이 작은 손짓에서 시작된다.


성사적 상상력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한때 붉은 우체통은 아무도 잊지 않겠다는 국가의 약속이었고, 제대(祭臺)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하느님의 식탁이었다. 우편함과 제대, 그 두 상징은 본디 같은 것을 향한다. 연결이다, 그리고 환대하는 것이다. AI 시민센터의 이야기는 결국 ‘기술을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작은 이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이야기다. 그것이 곧 ‘수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이다.


국가는 1,000조 원을 「기계」에 걸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지능이 정말로 ‘모두의 것’이 되도록, 비어 있는 방마다 사람을 들이고 손을 맞잡는 것이다. 비어 있던 성당의 방에 노인이 들어와 AI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순간, 어쩌면 그 웃음이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목말라하는 하나의 성사(sacramentum)일 것이다. 연대를 통한 구원은, 그렇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다.




미주(尾註)


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550조 AI 데이터센터 투자 견인…'1인 1 AI 에이전트' 시대 연다」, 2026.6.29.(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968284

2) 신앙교리성·문화교육성, 「Antiqua et Nova ― 인간 지성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관한 노트」, 2025.1.28. 라틴어·영문 원문: www.vatican.va. 

3) 레오 14세, 회칙 「Magnifica humanitas ―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을 지키기 위하여」, 2026.5.25 공포(서명 5.15), 「Rerum Novarum」(1891) 반포 135주년. 

4) 「사목헌장(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26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06항.

5) 「사목헌장」 69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02항(재화의 보편적 목적). 성경 인용은 사도행전 2,44-45(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6)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38항.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한국영성심리분석상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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