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다시 시편을 읽으며
  • 김경집
  • 등록 2015-08-13 10:08:30
  • 수정 2015-08-13 16:54:42

기사수정




솔직히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 나는 구약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약성경은 어쩔 수 없이 율법 중심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싫다거나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기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무엇보다 복음의 원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읽고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신교 목사건 가톨릭 신부건 구약성경의 구절을 지나치게 자주 인용하는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복음의 실천은 뒷전이고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율법의 인용으로 복종과 무비판을 은근히 강요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내가 구약성경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주 읽는 것은 예언서들이다. 그 예언이 구원의 희망을 보여주고 위로와 격려로 힘겨운 현실을 이겨내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초심에 대한 자기경계를 깨우기 때문이다. 겁과 욕망 때문에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거나, 혹은 그것을 제대로 응시했더라도 정작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새삼 확인함으로써 내가 진정 무엇을 어떻게, 어떤 자세와 의지로 이겨내야 할지 다독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들 삶으로 복음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게 도무지 무슨 상관인가. 복음 실천은 외면하면서 구약성경의 율법은 줄줄 꿰차는 사람들은 보면 나는 현대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게 시편이다.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복음서 말고 시편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온전히 열고 듣지 않았다. 아마도 구약성경에 대한 거리감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이고 일방적 찬양이나 구질구질한(?) 간청의 노래들이라 여겨서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내 마음이 닫히고 무지한 탓일 게다. 하지만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이 닫힌 건 복음의 실천은 외면하고 율법의 준수만을 강조하거나 복종과 존경을 강요하는 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의 영향도 전혀 없지는 않다고 변명해왔다.


최근 시편을 차분히 다시 읽었다. 참 모처럼 시편을 읽는구나 싶었다. 하나하나 구절에 매이지 않고 전체를 함께 조망하면서 읽었다. 늘 그렇지만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의지가 바뀌는 것이 성경이다.


시편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읽은 시편은 일방적 찬양이나 구차한 간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늘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고 하느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어떻게 제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긴 호흡으로 만나는 주제로 일관한다.


“정녕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인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 그의 의로움을 길이 존속하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치켜들리리라.”(시편 111, 6~9)


시편이 일관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은 거짓에 휘둘리거나 아부하지 않고 정의의 훼손에 분노하며 의연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담뿍 받는 내가 따라야 할 의무요 의미임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 실천이 결코 만만하거니 쉽지 않을 것이기에 용기를 간구하고 두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살아오면서 저지른 허물과 패악에 대한 회한을 감추지 않고 뻔뻔하다 싶을 만큼 애원하는 것이 어찌 시편 저자만의 몫일까?


미사 때마다 시편을 노래하지만 그것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지 못하는 몽매함이 어디 나만의 일일까? 시편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성공을 간청하는 것도, 원수를 내 눈앞에서 꺼꾸러지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 원수가 창과 칼 들고 내 목숨을 앗아가려는 적들이 아니고 이교도들도 아니다.


그런 점만 강조하며 똘똘 뭉쳐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이야말로 혹세무민의 흑심일 뿐이다. 우리의 원수는 약자를 억누르고 진실을 질식시키며 거짓과 불의를 제멋대로 부리는 자들이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복음이고 교회다. 경제는 자기들이 다 망쳐놓고 온갖 특혜와 비리로 탐욕을 채우게 한 대기업의 불의와 지나친 탐욕은 나몰라라 하면서 경제를 망친 게 마치 노동자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인 듯 윽박지르는데도 교회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규직은커녕 열정 페이 따위로 착취당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청년들의 불행은 외면하면서 연례행사처럼 청년 집회 한두 번 하면 다 될 거라고 생각하는 교회는 과연 시편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 국가의 안보를 수행하라는 기관이 오히려 자국의 시민의 사생활까지 감시하면서도 발각되자 말도 되지 않는 변명과 협박을 일삼는데도 교회는 침묵한다. 시편을 아무리 읽은들 고아와 과부의 삶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제 간청만 내세우는 것은 시편을 욕보이는 것이다.


시편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나부터 차분히 반성한다. 이 거짓과 불의를 꾸짖기는커녕 그 세력을 감싸고 외롭고 의롭게 들판에 서서 외치는 이들을 악의 세력이라고 몰아대는 교회라면 나는 사절한다. 장상부터 이토록 망가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외면하니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묻는다는 준엄한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부터 귀를 열어야겠다. 지금 현실의 악의 축이 무엇인지 생명은 무엇인지 시편은 우리에게 묻는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시고 네 생명을 지키신다.”(시편 121, 7)


나도 작은 디딤돌 하나 마련해야겠다. 들에 나가 돌 하나 들고 와서.



[필진정보]
김경집 :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아 가르쳤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