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 늑대‧곰 같은 야생 동물들이 자기 영역과 자신이 다녀간 곳에 오줌을 싸거나 자신의 체취를 나무에 묻혀 “여기가 내 땅”이라고 표시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야생동물에게만 해당되지 않지요. 심지어 ‘거룩해야 할’ 종교인들까지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더군요.
여러 해 동안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도들이 국내외에서 ‘땅 밟기’에 나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던 것도 ‘야생동물의 오줌 싸기’와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多)종교사회이면서도 이제까지 종교 사이에 큰 갈등 없이 유지되어오던 우리나라의 ‘종교 평화’를 해칠 뿐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까지 불러오는 ‘반(反) 종교적’인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 안(대구 동화사, 서울 강남 봉은사 등)과 밖(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사, 티베트)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땅 밟기’를 해대던 이들이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면서 숫자와 횟수가 줄어들고, 또 이들이 ‘주류 교단에서 벗어난 일탈(逸脫)자 집단’임을 다른 종교인들이 잘 알고 있기에, 주류 종교 사이의 갈등 상황으로까지 가지는 않아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서울의 중심, 아니 대한민국의 중심인 광화문에서 과거 땅 밟기를 하던 이들과 같은 ‘일탈자 집단’이 아니라 거대 주류 종교들이 적극 나선 땅 밟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앞으로 이런 분위기가 어떻게 번져나갈지 걱정스럽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을 적극 나서서 막아야 할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행정‧재정적으로 큰 지원을 하면서 오히려 조장(助長)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게 되니까 더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가톨릭, 광화문 땅 밟기 경쟁의 불을 붙이다
‘광화문 땅 밟기’ 경쟁에 불을 붙인 쪽은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조선시대 순교자 124명을 위한 시복(諡福) 의식 장소를 광화문으로 고집해 관철시킨 가톨릭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때부터 방한을 적극 추진하던 한국 가톨릭과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던 박근혜 정부의 이해관계는 방한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로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복식 장소를 두고서는 양쪽의 입장이 잘 맞지 않아서 여러 달 동안 팽팽하게 맞섰던 것으로 압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처음부터 광화문 광장을 고집하였습니다. (물론 이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권력에 희생된 선조 가톨릭교도들을 바로 그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었던 경복궁 정면에서 복자로 모셔서 원혼을 달래고, “자 보시오, 우리가 이제 이렇게 되었소!”하고 크게 외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화문 광장을 특정 종교 행사 장소로 한 번 내주게 되면, “우리도 …”하고 나설 다른 종교계의 봇물이 이어질까 염려하고 있던 정부는 국가 원수급인 교황을 경호하는 어려움 등을 들어 ‘곤란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전하였다고 합니다. (종교 문제 주무 장관이 여러 차례 명동성당을 방문해 염 추기경에게 정부 입장을 전달하며 다른 곳을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대통령 비서실장도 추기경을 찾아 간곡한 부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교구가 중심이 된 교황방한추진위원회[이하 ‘방추위’로 약칭]는 ‘시복식’ 장소로 광화문을 고집하는 데 있어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정부가 굴복하여 광화문으로 결정된 뒤에도, ‘방추위’에서는 행사의 주 무대인 제대(祭臺)를 광화문 바로 앞에 설치하겠다고 고집하였고 정부는 이를 막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합니다. (문화재 보호를 명분으로 ‘방추위’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조건으로, 추가 예산 지원이 이루어진 사실도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교황이 집전한 조선시대 순교자 124명에 대한 시복식 행사는 광화문에서 거행되었습니다. 8월 중순의 찌는 듯한 무더위에 수만 대중이 모인 행사였지만 작은 사고도 하나 없었고, 경호 상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찾아 그들을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솔한 모습, 방한 기간 동안 그분이 전해준 유무언(有無言)의 메시지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가슴까지 울렸습니다.
교황의 인기는 유명 배우나 스포츠 스타를 뛰어넘을 정도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까지였습니다. 국내 가톨릭 고위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황 방한을 상품으로 내세워 기념하는 흐름이 거세졌을 뿐, 그분이 전해준 감동의 메시지를 가톨릭 내부에서 실천해가는 움직임은 미미하였습니다.
어쨌든 가톨릭이 맨 먼저 불을 붙인 ‘광화문 땅 밟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불교, 광화문 땅 밟기 경쟁에 뛰어들다
지난해 시복식 행사를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하겠다는 가톨릭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 정부는 다른 주류 종교계의 여론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조계종 총무원을 찾아 ‘이해와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 자리에서 조계종 측 인사들은 “교황 방한을 적극 환영한다”면서도 “대신 우리도 명년에 광화문 광장에서 똑같은 규모의 행사를 할 테니 똑 같은 규모의 지원을 바란다”는 뜻을 강하게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부의 예산 지원까지 받아 진행된 행사가 지난 5월 16일 밤 열린 ‘무차無遮대회’였습니다.
제가 불교 지도자였다면, “시민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광화문에서 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웃종교인 가톨릭이 주관하는 것이라 비판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설사 정부에서 우리에게 똑 같은 기회를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아서 광화문 광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할 뜻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 당당하고 의연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열린 무차대회는 차량 통행을 모두 막은 무차無車대회였을지는 몰라도, 일반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불자 대중에게도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 행사였습니다. 아니 시민들에게 불편만 주고, 전국의 스님과 불자 대중들을 고생시킨 ‘해서는 안 될 행사’였습니다.
저는 그날 제 페이스 북에 사진 두 장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소장이 한강을 건너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렸고,
2015년 5월 16일 저녁 조계종 종정은 광화문에서 한국 선(禪)의 사망선언을 하였다.”
결국 2015년 5월 16일 저녁 광화문 광장을 요란한 조명으로 비추며 화려하게 펼쳤던 조계종의 ‘무차대회’는 가톨릭이 불붙인 ‘광화문 땅 밟기’ 뒤를 좇아 그 경쟁에 뛰어들면서 “우리도 해냈다”며 안도하는 분위기였지만, 이것은 ‘가톨릭에 대한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광화문 땅 밟기’라는 좋지 않은 바이러스가 주류 종교 집단 사이에 전염된 첫 사례입니다.
가톨릭, ‘광화문 땅 밟기 경쟁’에 다시 불을 붙이다
‘광화문 땅 밟기’가 이쯤에서 멈추었으면 다행이었겠습니만, 이번에는 다시 가톨릭이 또 일을 저질렀습니다.
지난 8월 23일, 가톨릭 서울대교구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집전했던 시복식 1주년을 기념해 축복식을 열고 시복식 제대가 설치되었던 자리에 ‘가로 1.7m, 세로 1m 돌판’을 단단하게 묻고 거기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문구를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한문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니, 이 자리에는 중앙 정부의 종교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서울시장, 국회의원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추기경 옆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동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땅 밟기’를 막아야 할 정부가 오히려 그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 지원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가톨릭 언론 몇 곳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며 ‘위세’가 아니냐는 우려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돌판 깔기 행사를 주례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작년 광화문에서 거행된 시복식을 통해 순교자들은 자신을 박해한 이들까지 용서하고 화해하여 인간성의 고귀함을 드높이 증명했음이 드러났다. 광화문은 박해자와 순교자가 화해하는 평화의 광장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 옆에 가면 아첨하기 바쁜 정치인들이야 자신들의 속마음과 관계없이 ‘아주 잘 한 일’이라며 칭찬을 하겠지만, 이것을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광화문 땅 밟기’ 더 이상은 안 됩니다!
8월 23일 가톨릭이 다시 ‘광화문 땅 밟기’를 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저는 걱정하였습니다. 내년 5월에 불교계가 다시 이를 좇아서, “종정예하를 모시고 개최한 무차대회 1주년을 맞아 광화문에 표지석을 세우겠다”고 요구하지 않을까, 정부는 또 어쩔 수 없이 허가해주고 그 돌을 세우는 자리에 장관과 서울시장‧국회의원들이 참석해 머리를 조아리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우려가 기우(杞憂)이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종교계와 정부의 하는 짓으로 보아 그리 마음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지나온 일과 앞으로의 우려를 담아 몇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가톨릭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을 팔아 광화문 광장을 시복식 장소로 고집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둘째, 가톨릭의 요구가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정부는 당당하게 그 요청을 거부하여, 종교 간에 ‘광화문 땅 밟기’ 경쟁이 일어나고 종교 화합과 사회 통합을 깨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어야 합니다. (정부가 왜 그리 당당하지 못했는지 궁금합니다.)
셋째, 불교계는 가톨릭이 불을 붙인 ‘광화문 땅 밟기’ 뒤를 따라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런 식의 콤플렉스 표시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넷째, 정부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광화문 땅 밟기’ 바이러스가 다른 종교계에까지 번지지 않도록 적극 방어해야 하고, 종교계도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멈추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우연히 얻은 사진 한 장과 그 안에 적힌 글이 마음에 들어 제가 요즈음 제 블로그와 페이스 북에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는데 함께 봐주세요.
맞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찾아오지만 증오는 누군가 가르쳐서 배우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일에 나서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