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5일 토요일, 비오다 흐림
석 달만의 귀국과 미루씨의 해프닝으로 내게 보내오는 패친, 카친들의 귀국환영인사가 대단한데 오랜만에 돌아와 일손이 안 잡히리라는 염려의 글도 꽤 된다. 그런데 벌써 이튿날부터 일손이 안 잡히는 게 아니고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우리가 온다고 손바닥 만한 잔디밭을 엽이가 깎긴 했는데 나머지 화단은 자기 나름대로 우주를 이루어 행복하게만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눈만은 행복하지 않다. 나는 넝쿨식물이 참 싫다. 잡초인 주제에 남을 감고 올라가 성가시게 하는 환삼덩쿨, 새콩, 나팔꽃 등은 내 눈에 띄는 대로 처형이다.
오후 내내 사정없이 베어내고 쥐어뜯다가 더덕이 눈에 띄었다. 꽃마저 곱게 피어 있다. “오메, 이쁜 것!” 거친 손길을 멈추고 살살 넝쿨을 골라가면서 “그래, 넌 걸고 올라가야 더덕을 키우고 꽃을 피우지?" 곁에서 잡초라며 사정없이 뿌리뽑히던 식물들은 내 형편없는 차별대우에 얼마나 억울할까? 옥잠화는 만발하여 남겨두고, 봄에 꽃을 피우고 지금은 누런 낙엽을 남긴 나리, 은방울, 둥굴레, 섬초롱, 개미취, 대취, 금낭화, 윤판나물도 모두 배어내고 뽑아냈다. 보스코가 실어다 버린 게 손수레 다섯 번 이상이다.
어제밤 비행기에서 보스코가 읽다가 간간이 들려준 환경신학자의 말대로는, 모든 식물, 모든 동물, 모든 곤충, 나를 마당에서 사정없이 물어뜯은 모기들까지 하느님이 사랑하기에 창조하셨고, 눈여겨보고 계시고, 사라진 뒤에도 그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시키신다는데...
엽이가 잔디 깎는 일 외에 다른 풀을 못 뽑는 까닭도 어떤 풀을 뽑고 어떤 풀은 남겨 꽃을 피우는지 감이 안 잡혀서일 테지만 싱싱하게 자라 오르는 생명을 잡초라면서 뽑아서 죽여 버리는 ‘살생’을 차마 못하는 대자대비 때문일까?
우리 구청 도봉구, 골목가꾸기 자랑을 하면서 하필 우리집 담벼락을 찍어서 냈다
빗속에 곽선생님 치과엘 갔다. 지난 6월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아침을 먹다가 앞니 하나가 ‘뚝!’하고 접시에 떨어지는 바람에 손주들 앞에서 ‘영구’가 돼버린 보스코! 다행히 의사 친구 안나마리아가 비엘라에 치과의사와 수술의를 대기시켜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즉석처방을 해준 덕분에 석달을 무사히 지낸 보스코! 매사를 나중에 하자는 ‘성나중씨’는 치과에 가는 차 안에서도 “곽선생님은, 잘 붙어 있으니까 나중에 하자고 하실 거야."라는 희망사항을 피력했는데...
곽선생님은 과연 어차피 그 옆의 앞니도 빼야 할만큼 상했으니까 임시치아가 다시 ‘뚝!’하고 빠져나오면 그 옆의 것도 빼고 송곳니도 만들어 넣어 네 개를 한데 걸어서 의치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리셨다. 대신 보스코에게 스캘링을 해 주시고 내 이도 한번 들여다봐주셨다. 우리 가족, ’공짜클럽‘의 치아담당 가정의이시다.
그 동안 가장 마음에 걸리던 사람은 엄마! 가기 전 아침마다 하듯이 오늘도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순난이에요.” “응, 외국 나갔다며?” (어? 우리 엄마 정신 말짱하시네?) “어제 왔어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구요? 넘어지신 일은 없구요?” “내가 애냐? 넘어지게? 잘만 있다 얘. 언제 오냐?” “내일 갈 게요. 맛 있는 거 사갈 게요.” “응, 그래라.”
그저께 또 넘어지셔서 얼굴이 하도 부어 엑스레이에 CT 촬영까지 하셨음을 알고 있는데... 대소변을 보살펴드리고 밥을 가져다 드리는 등 특별관리가 필요한 분들의 방을 한데 모은 3층으로 이사를 오셨다는 소식도 알고 있는데... 당신이 넘어지셨다는 개념도 없으시고 멍들고 부은 얼굴을 남보이기 싫다는 정서도 없으시다니 참 마음 아리다.
“누나, 그런데 엄마가 그리도 자주 넘어지시는데도 늘 찰과상이고 뼈가 안 부러지시는 게 참 이상해”(호천이의 전화). 옛날 이전(梨專) 농구선수로서 슬라이딩 기술이 탁월하신 걸까? 내가 닮은 그대로 골밀도가 워낙 좋아서 웬만해서는 안 부러지시는 걸까?
정원 일에, 시차적응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여보, 나 숙제 안 하면 안 돼?” “10년 동안은 안 돼! 당신 스스로 마음 먹은 거니까” “그래도 나 일기 쓰기 싫은데.” “치매예방에도 좋데.” “그래도 오늘은 그냥 자고 싶은데.” “그럼 그 뒤에도 10년을 더 쓰셔!” (자기가 무슨 최불암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