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깁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7장)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소환할 때, 하느님은 계십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하느님을 불러다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욕망, 탐욕에 이끌리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불편한 일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유명한 영화인 <암살>은 남한 시민들에게는 기억에도 희미한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지금 2015년의 대한민국이라는 시공으로 소환하는 작품입니다.
그 당시에나 지금에나 권력에 빌붙어서 양심과 민중의 생명과 나라를 팔아 사적인 안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들(가운데 상당수)이 친일매국한 이들의 (직간접적) 후손들이거나 지금도 그렇게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자본과 권력의 탐욕에 봉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정의, 진실, 평등, 박애, 자유, 등의 가치를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독립투사들의 기억을 통해서 소환되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느님의 현존은 에어컨이 가동되어 쾌적하며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 공간, 많은 헌금을 하면 공동체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고 (고위) 성직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오늘날의 기성 종교집단에서 흔히 내세우는 하느님의 현존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부단히 소환합니다. 세상의 법칙에 젖어 사는 이들이 귀를 막으며 소리질러도 종교집단까지 무감하고 굼떠서 예언자의 소리를 묵살하더라도 그는 이 소환작업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예언자는 자본과 권력의 총탄에 스러지는 순간에도 그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을 불러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의 생명을 함부로 대했기에, 여러분이 섬기는 하느님은 가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