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특별시 중구 소재 ‘서소문 공원’은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사형장으로 사용되며 국가권력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입니다. 특히 신유‧기해 및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던 장소로,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시복식을 주관했던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실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순교성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여러 해 전부터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온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고, 이웃 종교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대교구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 사업’이 본격 진행되기에 이르자 여러 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천주교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천도교(東學)를 비롯한 이웃 종교계와 역사학자들 뿐 아니라 천주교 내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염수정 추기경과 함께 서소문공원을 방문하고 1주일 뒤인 지난해 8월 25일 가톨릭신학자 김근수(가톨릭프레스 편집인)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천주교 서소문 단독 성지 추진은 무리>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가 ‘교황방문을 계기로 서울대교구가 서소문 성지사업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직감에서, 서울대교구와 가톨릭내부의 예상되는 반발을 무릅쓰고 신학자의 양심에서 이 글을 썼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글에서 “천주교가 서소문을 독점 소유할 권리나 명분은 없다”고 말한 그는 “서울대교구가 서소문을 단독 성지로 추진하는 일이 이치에 맞는지, 서소문 단독 성지 사업을 교황이 정확하게 보고받고 있는지?” 묻고 이어서 “교황의 서소문공원 방문 사실을 마치 교황이 서소문 단독 성지 사업을 찬성하는 신호로 해석하거나 선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단독 성지보다 서소문에 관계된 여러 종교의 공동 성지로, 일종의 평화공원으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한국 천주교가 앞으로 서소문성지 문제를 어떻게 추진해나가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그 정신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비판 때문인지 예산이 확보된 상황에서도 아직 사업에 제대로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사업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밝혔으므로, 제가 이 글에서 따로 이 사업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문양효숙 기자가 쓴 <서소문 성지 개발 본격화, 설계 공모 시작>(2014. 2. 16.)에 따르면,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이미 2011년 7월부터 서울 중구,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을 꾸준히 제안해 왔으며 여러 해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사업을 본격 추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2017년 8월까지 총 513억 원의 예산을 들여 ‘부지 1만 7340㎡’에 ‘서소문 역사공원’을 조성하며, 이곳의 지상 공원과 지하 주차장을 활용해 ‘순교자기념관’ 등을 세울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기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서소문 공원은 본래 중앙정부 소유의 국유재산으로 기획재정부에 관리권한이 있었으나, 서울대교구의 요청(또는 압박)을 받은 정치권 및 중앙과 지방 정부가 ‘순교성지 조성 사업이 가능하도록 국유지 관리 사무를 중구청장에 위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원 조성에 들어가는 사업비의 50%는 중앙정부, 30%는 서울시, 그리고 20%는 중구청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업비의 1%도 부담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수백억 원의 국민 세금을 쓰면서 오히려 종교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장이 되기 이전 총대리주교 시절부터 염 추기경은 이미 이 사업에 강하게 집착하여, 국무총리나 장차관, 청와대 고위 인사와 국회의원 등이 명동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 예산 확보를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실무적으로는 서울대교구 ‘서소문 역사문화공원 및 순교성지를 위한 위원회’의 한 신부가 이 사업에 매달리며 정치권과 관료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심지어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무직 인사에게 특정 관료를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가하면 고위 인사가 현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본인이 직접 해당 관료가 “협조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염 추기경과 해당 신부가 이 사업에 얼마나 매달리고 있었는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문양효숙 기자가 쓴 <염수정 대주교, 서소문 역사문화공원 순교성지 조성 역설>(2012. 9. 7.)이라는 기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추기경 서품 이전) 염 대주교는 서소문 근린공원이 “국내 최대 순교지이자 세계적 성지”라고 강조하고, 강론을 통해 “잃어버린 성지로 방치되고 외면되어온 서소문 성지가 세계적인 곳으로 탈바꿈할 기회가 왔다. … 단순한 근린공원을 세계 최대의 순교 성지로 조성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데도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3.
이처럼 서울대교구가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고, 그것이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이 사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사업과 관련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서울시 중구가 주관한 학술토론회 소식을 전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강한 기자의 <‘서소문 유적지’ 천주교 편향 논란 계속>(2015. 5. 21.)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이 토론회에서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의 박문수 부원장이 “이 사업이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2014년 교황 방한을 계기로 급조된 사업이고’, ‘국가와 지자체가 천주교를 위해 국고를 헌납하는 사업’ 정도로 비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 이 사업의 시작은 천주교와 무관한 일이다. … 이 사업은 천주교를 위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 ‘지하 성당’이 그런 오해를 사는데, 천주교가 이를 정부와 지자체에 요구한 적은 없다. … 천주교 입장에서는 성지 지척에 순교 터를 굽어보고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세운 중림동(약현) 성당이 있고, 오래 전부터 매주 금요일 서소문 공원에서 미사를 드려오던 터라서 굳이 성당 신축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는 지난 9월 1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칼럼 <기억의 공간화, 공간의 역사화>에서 천도교인들이 ‘천주교는 이미 서소문 공원에다 조형물을 세워 <기억을 공간화>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중구청이 계획하는 대로 개발을 진행하면 명실 공히 이 지역의 역사는 천주교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면서 “그들이 우리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서울대교구의 ‘서소문 순교성지’ 추진에 대한 천도교의 반응과 비판이 오해일까요?
염 추기경이 과거 서울대교구 총대리주교와 대주교 시절부터 이 사업에 그토록 강하게 집착하였음을 본인이 칼럼을 연재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천주교 내외부의 비판 여론에서 추기경을 보호하기 위한 평신도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이라도 받은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추기경과 그 신부를 불신하기 때문에 그들의 과거 발언과 행동이 서울대교구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여겨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천주교 측에서 요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서울시와 중구청이 지하성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면 이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과연 그 점까지 따져보고 이런 발언을 했을지도 궁금합니다. (그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고정 필자입니다. ‘서울대교구의 서소문 단독 성지사업’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찬성하는 입장인가, 아니면 그 토론회에서 한 발언을 개인의 의견으로 실어주었을 뿐인지도 궁금합니다.)
4.
이제 서울대교구는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 사업이 서울대교구와 정말 무관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추기경은 지난 여러 해 동안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했던 자신의 발언이 아직도 유효한지, 혹 상황이 바뀌어 그 발언들을 취소하려는 뜻이 있다면 본인이 직접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서울대교구와 추기경은 무대 뒤에 숨어 있고 그의 입을 통해서 간접으로 비공식 입장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과 신도들 앞에 정직해야 할 고위 성직자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덧붙임:
며칠 전인 9월 22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쓴 <밝은 빛은 그림자가 어두운 법>이라는 박문수씨의 글에서 그는 불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국교의 위세를 누린 이후로는 늘 바닥이었다. 명암 가운데서 어둠이 더 길게 지배한 세월이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워낙 바닥을 오래 기다보니 조금만 신통한 모습을 보여도 과한 칭찬을 받는다. 개신교가 하는 일에 비하면 손톱 크기만도 못한데 오히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 글에서 ‘불교가 더 잘한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더 잘한다’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만,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불교에 대해 ‘워낙 바닥을 오래 기다보니 조금만 신통한 모습을 보여도 과한 칭찬을 받는다.’든가 ‘개신교가 하는 일에 비하면 손톱 크기만도 못한데 오히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라고 평하는 것이 옳은지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불교계에서는 그를 종교 화합에 앞장서는 대표적 천주교인으로 여기고, 불교계 주최의 세미나에 발표자와 토론자로 초청하거나 그의 글을 불교계 언론에 게재해온 것으로 아는데, 이웃 종교의 선의(善意)를 이런 식으로 모욕해도 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