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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남편으로선 어느 편이 낫겠어?”
  • 전순란
  • 등록 2015-09-30 15: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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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9일 화요일, 맑았다 흐려짐


사람이 참 독하다. 살아남으려고 어느 동물보다 더 질긴 인내력을 발휘한다. 대장내시경을 하려면 제일 징그러운 게 정체 모를 그 묘한 물약을 맛보는 일이다. 시큼털털하고 찝질하기도 한데다 그 맛을 포장하느라 레몬향까지 넣었으니..... 우리 보스코처럼 도통 물을 못 마시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옆에서 보는 사람마저 고문을 시킨다. “도저히 못 먹겠다. 나 그만 둘란다.”는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요만큼 남았으니 한 모금만 더”라면서 통사정해야 하는...


다행인지 그의 대장은 깨끗해서 더 이상 검사를 안 하기로 했는데 나는 수년전 제법 큰 용종을 떼어냈고, 조직검사에서 암으로 이행하는 바로 전단계이니 5년 내에 꼭 검사를 다시 하라는 엄포까지 들은 터여서 미루고 미루다 내일로 검사를 예약해 둔 터다.



돌팔이의사 보스코는 용종을 떼어내면 그 자리에 우후죽순 올라오듯 용종들이 올라오리라고, 의심스러운 종기가 발견되더라도 조직검사를 하려고 조직을 떼어내면 암세포가 무섭게 번질 테니 조직검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무식한 협박을 하고 있다(그는 타고난 비관주의자다). 암이 발견돼도 몸에 칼을 대지 말고 운명만큼만 살자고 약속한 터이긴 하지만...


별것 아닌 검사를 하러가면서 마치 주변정리를 하듯이 빨래거리를 모두 찾아내서 삶고 빨고 널었다. 집안도 위아래 층을 말끔히 청소하고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모조리 끝내고 쓰레기통 청소까지 마저하고...


아래층 세탁기를 들여다보니 언제 돌렸는지 모를 엽이의 빨래가 탈수되어 반쯤 마른 채 구겨져 있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보, 지난번 빵고를 보니까 세탁을 해서 곱게 접어 꼭꼭 두드려 말끔하게 널면서 ‘엄마, 이렇게 해서 널면 웬만한 건 다리미질 할 필요가 없더라구요.’라며 이 엄마를 가르치더라구요.”하면서 은근히 아들을 자랑하고 엽이를 흉봤더니만, 보스코가 묻는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선 어느 편이 낫겠어? 엽이 아니면 빵고?” “그야 물론 엽이죠. 빵고야 천상 수도자로 혼자 살아야 하니까 그게 좋겠지만 마누라에게 그랬다가는 여자가 도망가고 말겠죠.” “그럼 답이 나오네.”


사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어느 한 구석 빈 데가 있는 사람이 모든 점에서 완벽한 사람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런 면에서 빈 구석이 한 군데가 아니라 사방 팔방이 텅텅 빈 보스코야말로 내 천생연분인지도 모르겠다. “빵고가 딱 당신 닮은 거 알아?” 보스코의 마지막 일침.




집 옆의 공터는 먼 옛날 우리 주부들이 불도저를 불러서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러다 어느 새 자동차 주차장으로 변했고, 구청이 선을 그어 노인들의 쉼터 겸 어린이들이 놀게 이런저런 울타리를 만들었다. 오늘 올라가 둘러보니 커다란 바위와 막대기로 된 울타리마저 자동차로 밀어뜨리고 주차를 한 파렴치한 족속이 있었다. 사방에 쓰레기가 봉지 째 버려져 있고...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젊은 여자 하나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하는 말: “아줌마가 관리인에요? 여기저기 청소 좀 하시던가 구청 동사무소에 연락해서 좀 치우시지 그래요?”(어라 이 새댁, 이 동네 터주대감을 몰라보고?) “애기엄마, 이 동네는 주민이 주인이에요. 더럽다 보면 직접 연락하든가 운동 삼아 저기 저 빗자루로 한번쯤 쓸면 좋을 텐데...” 라는 내 대꾸에 “흥, 별꼴이야.”하는 얼굴로 휑하니 가버린다. 터줏대감 전순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고향에 갔던 엽이가 저녁나절에 돌아왔다. 엄마의 설거지도 도와드리고 밤 밭에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는 밤도 줍고 했더니 허리가 꺾어지게 아프더란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무슨 그릇이 그렇게도 많은지... 집 옆의 외양간에 일곱 마리 소를 키우는데 소꼴을 묶다 보니까 소는 절로 혼자 크는 게 아니더라며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알겠더란다.


철든다는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만 아니고 다른 것에 새삼 눈뜨는 것임을 실감하고 왔나보다. 단식중인 여자가 차려준 저녁상을 보스코와 엽이 둘이서 맛나게 먹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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