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두 단어 사이에는 작지 않은 의미의 차이가 있다. ‘사실’이란 단어 앞에는 ‘나의’ 혹은 ‘저 사람의’ 등과 같은 소유격이 사용되지 않는다. 반면 ‘진실’이란 단어 앞에는 다양한 인칭의 소유격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단 하나’의 (객관적) 실제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진실은 (주관적인) ‘복수’의 실제를 상정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사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은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50년에 개봉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 明)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여럿’의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세 사람과 이를 지켜본 목격자의 진술은 제각각이다. 영화는 네 사람의 엇갈리는 진술을 통해 인간의 조작적 기억과 그 바탕에 있는 자기보호 본능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각 진술에 담긴 ‘거짓’이 아니라 각 진술에 담긴 ‘진실’이다. 네 사람은 각자가 경험한,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얘기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사실에 대한 각자의 진실이다. 영화는 누구의 진술이 ‘사실’인지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건에 연관된 네 사람의 진실을 떠난, 독립적인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인간의 현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은 흔히 나의 진실만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의 진실만이 사실이라면 저들의 진실은 ‘거짓’이 된다.
어느 한쪽의 진실만이 사실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진실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갈등과 대립은 불가피하다. 또한 그 대립은 종종 참과 거짓, 정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여겨지면서 극한적인 대립적 상황으로 이어진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 한다’면서 끝없는 반목과 투쟁을 다짐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사람들은 흔히 ‘옮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곧 ‘옮음’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옮음을 실천하려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의 방향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자신의 옮음만을 ‘정의’라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의 ‘옮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양상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옮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라 ‘나의 옮음’과 ‘저들의 옮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옮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이다.
조성택 ㅣ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고려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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