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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엄마도 때로는 보호를 받고 싶은데....”
  • 전순란
  • 등록 2015-10-02 15:47:23
  • 수정 2015-10-03 11: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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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30일 수요일, 흐리다 맑게 개임



간밤에 더럽힌 침대 시트들을 몽땅 걷어서 빨았다, 새벽 다섯 시에! 꼭두새벽에 세탁기를 거듭 돌리는 아내를 보고서 보스코는 말없이 지켜본다. 언젠가 내가 정말 치매에 걸려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지도 이불 요에 실례를 했는지도 도통 모를 지경이 되면 저 남자 불쌍해서 어찌할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아내의 아픔에 넋을 놓고 말았다는 홍해리 선생님의 시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시인은 그 아픔마저 ‘아내의 치매행(致梅行)’으로 승화시키면서 부모나 배우자의 비슷한 처지에 가슴 에이는 이들을 다독이고 계시다, 그 나이면 누구나 그 길을 건넌다고 타이르면서.... 정말 시인들은 많은 이들이 고해(苦海)를 건너게 노를 저어주는 사공 같다.



아침 8시에 한전병원 대합실에 도착하니 내가 2등. 정기 검진으로 들어가 키와 몸무게를 재고, 귀가 들리나 눈이 보이나 살피고, 혈압을 재고 있으려니까 추석연휴를 보낸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누구나 하는 내시경이지만 내 눈으로 모니터에서 내 위속을 들여다보면서 검사를 하니까 흥미롭기도 하고 힘도 덜 든다.


윗벽에 뽈록하게 솟아난 부위를 의사가 뜯어 조직검사를 하겠다는데 뜯어낸 자리에 금방 피가 고인다. 순서대로 엑스레이는 찍었지만 유방암 검사는 하지 않았다. 문선생님 조언대로, 피폭되는 방사선이 너무 많아 자주 하는 게 되레 발병을 촉발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심전도를 하고서 예약된 소화기내과에 갔다. 


내 차례가 지났는데도 앞 환자의 출혈을 수습하느라 의사가 애를 먹고 있단다. 환자의 누나인듯한 여자가 “맨 날 술만 퍼먹더니 딴 사람들만 고생시키고...”라고 푸념하면서 별 걱정을 안 보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나온 의사섐은 검사과정을 내게 소상히 설명하면서 “어머니, 아프면 얘기하세요.”라는 부드러운 호칭으로 나를 불러 저런 의사라면 별탈없겠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7일 단식을 하고 어제밤에 그 고약한 물약으로 속을 마저 비운 참이어서 스크린을 흥미진진 바라보며 내 뱃속여행을 하였다. 정말 주름도 많고 계곡도 많고 분홍의 상아빛 터널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동굴여행이 아름답다는 기분마저 든다. 어쩌다 참외 씨 한두 개가 복병처럼 숨어 있어 과일을 먹어도 참외 씨는 먹지 말아야겠다는 맘도 먹고....



내 귀가가 늦어지면 안절부절 못할 보스코가 걱정스러워 진정제를 맞아 아직도 어지러운 상태였지만 그냥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따라나서겠다는 그에게 “보호자라면서 환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가 환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 염치를 일깨워주며 말렸더니만 순순히 집에 남았다.


우리 골목에 차를 세우고 대문을 열고 비칠비칠 들어서자 그래도 안심했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란! 남편인지 막내인지 손주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그렇게 집에 오자 나도 마음이 놓여 ‘빵괴방’(빵기 + 빵고 = 빵괴)의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5시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경제인들을 상대로 하는 교양강좌 프로그램을 담당한다는 PD 아가씨가 약속대로 집으로 찾아와 보스코와 대담을 하고 돌아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소재로 하는 강좌라는데 보스코는 저런 고전을 시청자들에게 얘기해주겠다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겨지나 보다. 때마침 경세원이 보스코가 번역하고 주석한 라틴어 원문번역판을 10월중에 출간할 생각이어서 기회도 닿는다.



하루가 참 길었다. 그래도 잠에서 깨어나, 빨래해서 말린 시트에 다림질을 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서 가슴을 쓸어내렸을 안도감을 보스코는 “이모님 검사결과가 어때요?”라고 물어온 엽이에게 “일찍 들어오너라. 이모가 맛난 저녁 해 줄 게다.”라고 표현했다. 위문전화를 해 온 미루의 말마따나, “엄마도 때로는 보호를 받고 싶은데, 아아~....”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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