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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교부들의 가르침 9
  • 유대칠
  • 등록 2015-10-14 16:30:11
  • 수정 2015-10-26 09: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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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책으로 알 수 없다. ‘아픔’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한다고, 참된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다. 아파봐야 안다. ‘아픔’이 되어봐야 안다. 책이 아닌 삶에서 알게 된다. 책에서 배울 순 없다. 


‘번뇌시도량’(煩惱是道場)이란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의 말이다. 참된 깨우침은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에서 얻어진다는 말이다.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이 현실의 공간을 외면하곤 참다운 깨우침을 얻을 수 없다. 현실의 고통에서 고개 돌리고 앉아 그저 책 속에 얻은 깨우침은 살아 숨 쉬는 삶의 참된 깨우침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 사람의 아픔 앞에 무력한 깨우침일 뿐이다. 


참된 깨우침은 그렇지 않다. 이미 어린 시절, 인도 유학을 다녀온 쿠마라지바다. 많은 책을 읽은 대학자다. 하지만 그 지식이 쿠마라지바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 아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삶이다. 공(空)에 대한 수많은 지식이 아니다. 번뇌로 가득한 그의 삶이었다. 왕족이며 대학자였다. 하지만 조국의 패망 후 정복군의 조롱감이 되어 18년을 살았다. 절망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런 18년의 포로 생활 동안 익힌 중국어는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함에 있어 소중한 수단이 되었다. 그 고통의 시간, 그 악마의 장난 같은 시간도 그의 뛰어난 결실을 위한 고마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공에 대한 그 많은 이론과 지식이 아닌 삶으로 다가오는 공 사상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깨우침 속에서 그는 불교의 정신이 녹아든 번역을 할 수 있었다, 불교의 핵심을 드러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은 그의 말이다. 


이 세상은 번뇌로 가득하다. 지중해 난민 비극을 보자. 단지 3살 아기 쿠르디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과격 단체에 의하여 산 채로 태워지고 목이 잘린다. 힘없는 여성은 성노예가 되어 매매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엔 매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폭력 속에서 죽거나 다치고 있다. 아프리카도 여기 저기 잔혹한 내전과 가난으로 많은 이들을 죽고 있다. 


이 땅 역시 고통과 아픔 그리고 번뇌는 가득하다. 아직 찾지 못한 세월호의 9명이다. 어느 노동자는 자신의 몸을 트럭에 묶었다. 일하다 살이 찢어져 뼈가 보이는 골절을 당했지만, 쉴 수 없었다. 회사의 요구에 700km를 다니며 일했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쇠사슬이다. 또, 쌍용차와 용산의 아픔이 있다. 그뿐인가! 밀양 할머니의 아픔이 있다. 


정말 이 세상은 번뇌로 가득하다. 그러면 번뇌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살아야하는가! 그냥 고개 돌리고 살아야하는가! 고개 돌리고 경전 한 권 손에 들고 기도에 열심이면 그만인가! 어차피 달라지지 않는 세상, 죽은 뒤 천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가! 이것이 온전한 신앙인가!  


번뇌시도량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현실을 외면하고 얻은 깨우침은 무엇일까? 그런 깨우침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여기에서 번뇌시도량의 깨우침을 얻은 교부 헤르마스(Hermas)가 떠오른다. 학교와 책이 아닌 현실의 삶을 통하여 고통과 아픔을 깨우친 헤르마스가 떠오른다. 그에게 신앙의 첫 걸음, 회개는 고통 앞에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줌이다. 소유의 공유다. 


헤르마스는 노예였다. 돈에 사고 팔리는 노예였다. 노예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사고  파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노예는 사고 파는 물건이다. 돈 들고 살 수 있는 존재다. 비록 인간의 모습이지만, 물건으로 살아가는 노예다. 헤르마스는 노예였다. 그래서 노예의 아픔을 안다. 단지 단어의 뜻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참된 의미를 안다. 그런 노예 헤르마스가 자유의 몸이 된다. 물건에서 인간이 된 헤르마스는 상인이 된다. 



노예의 고통을 알기에, 무시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이 세상을 향해 복수라도 하듯이 온갖 부정을 저지르며 큰 부자가 된다. 여기 저기 팔려 다니던 이가 이젠 가정을 일구며, 제법 큰소리치며 사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토록 소중하게 모은 재산을 잃어버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의 밀고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런 온갖 고통 이후 드디어 헤르마스의 가족 모두는 사전 속에 나오는 의미의 신앙이 아닌 참된 의미의 신앙을 가지게 된다. 


헤르마스 역시 쿠마라지바와 같이 ‘번뇌시도량’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삶은 번뇌의 공간이었다. 노예의 고통을 안다. 물건 대접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또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또 그 더러운 악행으로 부유함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배신이 무엇인지도 알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고통을 단지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 참된 의미를 알게 되었다. 18년간 포로의 삶 속에서 쿠마라지바가 참된 깨우침을 얻게 되었듯이, 헤르마스도 그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된다. ‘아픔’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아닌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참된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아파본 사람은 아픔을 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3살 쿠르디의 죽음 앞에서 복잡한 정치‧종교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해설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아픔이 있단 사실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그저 남의 아픔이라 이야기한다면, 참으로 잔인하다.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아픔이다. 이런 저런 해설은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에 대한 공감이다. 눈물이다. 아파본 사람은 아픔을 안다. 진짜 아파본 사람은 아픔이 책이나 교실에서 얻게 되는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안다. 아픔은 책이 아닌 삶에서 얻어진다. 헤르마스는 그랬다.


헤르마스가 회개의 징표로 삼은 것은 부유함에 대한 무관심이다. 소유한 것을 가난한 이와 공유하는 것이다. 신앙인이 되는 첫 걸음인 회개, 그 회개를 그는 소유욕에 대한 무관심과 소유에 대한 공유라고 한다. 그냥 하는 공유가 아닌 아픔 앞에 그 아픔을 알아보고 나누는 공유다. 이러한 공유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공유 없이 그저 자신의 부유함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에게서 올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그렇게 살아봤다. 악행을 하며 소유욕으로 살아봤다. 그래서 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노한다.


“그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부유함도 가지고 있다구요. 그들은 막상 자신 앞에 어려움의 시간이 다가오면, 그들의 부유함을 위한 사업을 위해 주님을 부인할 겁니다.”(환시 1, III, 6)


헤르마스는 부자를 안다. 그도 부자였다. 부자는 신앙의 길과 자신을 위한 길이 충돌할 때, 자신의 부유함을 위한 길을 선택한다. 주변을 보자.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매일 같이 모두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익과 신앙이 충돌할 때, 큰 고민 없이 소유욕을 채우기 이익을 추구한다. 그것이 부자다. 


요즘 권력 앞에 고개 숙이고 아픔 앞에 고개 돌리는 신앙이 유행한다. 아픔 앞에서 고개 돌린 신앙이 참 신앙이라면, 부자들의 맘은 편할 것이다. 부담 없이 소유욕만을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고개 돌리고 사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믿고 싶을 거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신앙이라 헤르마스는 분노한다. 그에게 참된 회개의 징표는 부유함이 얼마나 헛된지 깨우침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부유함을 잘라낼 때, 그들은 하느님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둥근 돌이 잘리지 않고 그렇게 있다면, 자신의 어느 부위도 버리지 않고  그렇게 있다면, 건축에 사용되는 네모난 돌이 될 수 없듯이 이 세상의 모든 부자들도 그 자신의 부유함을 잘라 버리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환시 1, III, 6)


그는 나쁜 부자였다. 그래서 안다. 그러한 삶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안다.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한다.


“우선 그대 자신에게 배우세요. 그대가 부자일 때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마나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나요. 생명을 위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느님에게 쓸모있는 인간이 되세요.”(환시 1, III, 6)


그는 삶으로 알았다. 스스로 번뇌하고 아파하며 알았다. 참다운 회개가 무엇인지! 참다운 신앙의 깨우침이 무엇인지! 책이나 학교가 아닌 삶으로 깨우쳤다. 자신만을 위한 소유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얼마나 남에게 아픔이 되는지! 헤르마스는 스스로 아프고 그 아픔의 쓰림을 알게 되었다.


부자의 소유욕 앞에 가난한 이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깨우치게 된다. 참다운 회개는 소유욕을 버리고 공유함에 있다. 아픔 앞에 고개 돌리지 않고 따져 묻지 말고, 손 내미는 것이다. 선행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 즉 회개다. 참으로 회개한 이라면, 고통 앞에 고개 돌려서는 안 된다. 


“과부를 도와주고,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어려움에 빠진 하느님의 종을 구하고, 손님을 따스히 맞이합니다.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 않고, 평온하며, 모든 이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노인을 공경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갑니다. 형제애가 더해지고, 치욕을 견디면서 인내하지만 악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이를 위로하고 신앙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다시 돌아오게 도와주고 확신을 심어줍니다. 또 죄인을 훈계하며 채무자와 가난한 이를 독촉하지 않으며 억압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선함을 아끼지 마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계명 8)


헤르마스는 아픔을 삶으로 배웠다. 무엇이 가난한 이를 아프게 하는지 안다. 신앙의 첫 걸음, 회개는 그 아픔에 손을 내밀고 안아줌이다. 이것이 회개한 이의 모습이다. 참된 하느님을 위한 삶은 사회적 고통과 가난으로 아파하는 이를 위한 공유의 삶이다. 선함을 아끼지 않는 삶이다. 그저 입으로만 모두를 위해 기도할 뿐, 삶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는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은 이다. 선행을 아끼는 이라면, 온전한 신앙인이 아니다. 신앙을 말할 수 없다. 자격 없다. 고통과 가난 앞에 고개 돌리지 않고 실천하는 기도의 삶, 그것이 신앙이다.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속에 있다. 생존을 위해 생명을 건 투쟁을 하고 있다. 오직 노동만이 온전히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을 사용할 권리라는 교부들의 가르침은 무시된 지 오래다. 그 아픔 앞에 눈감고 고개 돌리며 살아간다는 것, 헤르마스는 회개가 덜 된 사람이라 분노한다. 참된 회개가 이루어진 이라면, 아픔을 덜어줌을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모든 이들을 가난에서 구해야 한다.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는 지금 아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을 그 핍박의 상황에서 구해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가난한 이의 아픔이 고문 당하는 죄수의 아픔보다 더하다.” (비유 10, X, 4) 


회개한 신앙인이라면, 고통에서부터 가난한 이를 구해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이것이 신앙의 삶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사회적 약자들, 그 가난함의 아픔 앞에서 고개 돌린 무관심, 헤르마스는 이 무관심에 분노한다. 사회적 아픔 속에서 자살로 죽여지는 아픔에 대하여 헤르마스는 분노한다. 그것은 무관심의 탓이다. 아픔을 외면하며 고개 돌리고 살아가는 이기적 신앙의 탓이다. 


“견딜 수 없는 불행으로 많은 이들이 자살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불행을 알면서 그를 구해내지 않는 것도 큰 죄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비유 10, X, 4)


우리 사회를 보자. 많은 이들이 자살이란 이름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자살을 죄악이라며 많은 신앙인들을 그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 아픔을 보지 못했다. 참된 회개를 한 신앙인이라면, 그 아픔에 손 내밀어야 했다. 그 무관심! 헤르마스는 그 무관심에 분노했다. 그리고 슬프지만,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분노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회개는 헤르마스의 분노 앞에 자유로운가? 삶으로 깨우친 헤르마스의 그 분노는 지금 우리에게도 날카롭다. 아프게 한다. 이제 진정 회개하자. 우리 앞에 아픔을 그냥 두지 말자.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삶으로 하는 기도를 하자. 헤르마스와 같이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가 되는 삶의 경험이 아니라면, 지금 눈 앞에 노숙자를 보자. 


눈 앞에 수많은 아픔을 보자. 세월호와 노동자의 아픔을 보자. 고개 돌리지 말자. 그리고 움직이자. 그렇게 삶이 되는 기도가 참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참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 헤르마스는 책이 아닌 삶으로 알게 된 그 회개 앞에 부끄럽기만 하다.



[필진정보]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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