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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라도 아플 틈 없는 몸뚱이들
  • 전순란
  • 등록 2015-10-13 11: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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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비 흐림 그리고 맑음


왕산에 붉은 아침놀이 찬란하다. 저 빛을 내려고 태양은 얼마나 긴 치장을 하고서 얼굴을 내밀까? 그런데 조금 뒤 마당의 태양열집광판 위로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좀 전의 예쁜 얼굴을 “흥!” 하면서 감춰버려 변덕스러운 기집애 같다.


비바람이 지나면 한기가 몰려온다. 3층 다락으로 올라가 자그마한 전기난로를 들고 내려온다. 보스코가 서강대에 재직할 당시 그의 연구실에서 몇 해를 보낸 난로다. 난로를 켜지만 열 평 넘는 서재를 덥히기엔 부족하다. “여보, 추우면 별 수 없어요. 내복에다 오리털 점퍼에다 수면양말도 신어요.”라고 말은 하지만 보스코는 나보다 추위도 더위도 훨씬 덜 탄다. 그는 늘 손발도 몸도 따뜻해서 요즘 같은 날씨에는 껴안기에 좋은 ‘인간난로’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목현 보건소엘 갔다. 어제까지는 어르신들만 무료로 맞았고 오늘부터는 65세 이하도 8천원 요금(병원에서는 3만원!)을 내면 맞을 수 있어 사람들이 꽤 북쩍였다. 독감예방주사가 무슨 보약이라고 이 보건소 저 보건소 다니면서 주사를 맞는 노인들도 있는지 간호사가 거듭 맞지 말라고 큰 소리로 신신당부다.


서울에서도 하릴없는 노인들이 아침부터 의원들을 한 바퀴 돌면서 이 집에서 약 짓고 저 집에서 주사 맞고 딴 집에서 물리치료 받는 병원순례는 흔하고 그러다 보니 국민의료보험비의 절반을 숫자 20%의 노인들이 쓴다는 통계가 나온다. 몸이 아파도 직장상사 눈치 보느라 병원도 못가는 젊은 세대의 눈총을 살 짓이다.


그래도 의사가 있는 보건소여서 한전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보여주며 설명을 들으려 했더니만 그 공익의사는 내가 물을 적마다 일일이 인터넷을 뒤지거나 “병원에 가서 알아보세요.”라는 답변을 해서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 하기야 의사 체면에 “전 모르겠으니 병원에 가보세요.”라는 대답도 겸허한 자세일 수 있다. 명색이 읍내 준종합병원 원장이라는 사람이 피부병 환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조건 “당신 옴이요.”라면서 처방전부터 쓰던 일을 당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항의하자 “난 보나마나 다 알아요!”라고 했다.)




함양의 주치의는 “헤리코박터균은 국민 70%가 지니고 있는 ‘국민병’이니 신경 쓸 것 없고”, “신장 치수는 물이나 많이 마시면 되고”, “위장 쓰린 건 맘 편히 먹고 과로하여 스트레스 쌓이지 않게 하세요”라는 지당한 말씀으로 나를 다독이신다. 살만큼 살았고 이 나이에 이만큼 건강하면 됐으니 죽을 때까지 맘 편히 자알 살라는 요지였다. 인사차 들른 한의원 여의사는 내게 이러저러한 한약들을 선물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보건소, 양의원, 한의원을 차례로 '순례'한 셈이다.


읍에 나간 길에 보스코는 머리를 깎고 읍사무소에서 서류도 떼고 해서 그 보상으로 붕어빵 천원어치를 사주었다. 보스코처럼 자기가 하는 공부 외에 모든 걸 내려놓고(아내에게 떠맡기고) 맘 편히 사는 남자도 드물게다.



집에 돌아와 부지런히 점심을 해 먹고 밭으로 나갔다. 꽃씨를 얻어왔으니 꽃밭을 만들어 내년 봄 꽃을 피워야지... 풀을 뽑고 호미로 흙을 긁어 올려 밭이랑을 만들었다. 보스코도 괭이를 들고 돕는 시늉을 하는데 이런저런 강연을 준비하는 차여서 “가서 공부하라!” 올려보내고 나 혼자 둔덕을 만들었다.


빨강과 분홍 들양귀비씨를 뿌리고, 배밭을 따라 기다란 이랑을 만들어 유채를 심었다. 박팀장님 말처럼, 유채는 씨를 뿌린 뒤 갈퀴로 한번 긁어주고, 들양귀비와 안개꽃, 수레국화는 그냥 흩뿌리기를 했다.


더 이상 안 보일만큼 어두워 집으로 올라오는데 마르타 아줌마도 밭에서 내려온다. 시골 밭일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일 때까지 하는 게 기본이다. 이장댁이 애호박 세 덩이를 가져다 두집이 나눠 먹으란다. 장에서 사온 고구마와 백김치로 저녁을 먹고, 장터 단골에게서 얻어온 열무로 김치를 담고 나니 열시. 두 식구 살면서도 이렇게나 할 일이 끝도 없으니... 내 몸둥이는 바빠서라도 아플 틈이 없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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